청주 공원의 역사, 이렇게 시작됐다

2014.11.18 16:21:34

공원은 공공녹지로서 자연지(自然地)나 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후생적 조경지로 정의된다. 전자를 자연공원, 후자를 도시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이 역사적으로 언제 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대공원은 중세 이후 영국의 왕후·귀족이 소유·독점 사용하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에서 비롯됐다.

청주의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일제 강점기 때 등장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에는 '서공원'(현 사직동 충혼탑 자리·사직산)과 '동공원'(현 당산 일대·명장사 뒷산))에 대한 설명이 동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최소한 1920년대 초반부터청주에도 공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공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먼저 『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공원(현 현충탑 인근) 자리에 세워져 있는 '天地神檀' 비. 그러나 이는 1970년대 세워진 것이다.

'그 무렵에는 청주에 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鈴木 장관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땅을 깍아 도로를 개척하고, 여러 종류의 수목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돌을 운반하여 벤치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오처옥(吳妻屋)을 설계하여 휴식장소로 삼도록 하였는데, 동공원과 함께 성대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과 도모하여 그곳에다 청일, 러일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의 기념비를 세웠다.'-<112쪽, 정삼철 역>

인용문은 당시 서공원이 청주시민의 휴식공간이 아닌 일본 전사자를 앞세워 내선일체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도시내 기념적 장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오처옥'은 당시 유명한 요리집 이름이다. 오쿠마온보는 자작인지 아니면 타인 시를 옮긴 것인지 불분명하나 서공원을 주제로 『청주연혁지』에 시를 싣기도 했다.

'높고 낮은 언덕이 냇물 건너에 가로 놓이고(起伏丘岡隔水橫) / 늙은 솔 늘어진 가지가 작은 사당으로 늘어졌구나.(老松蟠屈小廟傾) / 한 밤중에 걸음을 옮겨 단 위에 서니(三更移步立壇上) / 둥글고 밝은 달이 읍성에 걸려 있네.(明月一輪懸邑城)'-<113쪽, 〃>

현 사직동 충혼탑 일대에서 청주시내를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 그려져 있다. 『청주연혁지』는 동공원에서 대해서는 청주 신사에 초점을 맞춰 기술했다.

'예전에 존재하던 성황사 초석은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산허리에는 진위대 병사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볼품없는 묘비만 서 있다. (…) 장관은 시민의 희망을 받아들여 서공원에 대한 동공원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자를 세우고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석불 등을 곳곳에 안치하였으며(…) 근년에는 한편으로 상수도의 저수지가 설계되어졌고, 이 부근 일대에다 벚나무를 식재하였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화사하게 개화를 보게 되었다. 지금 또한 청주신사를 개축하면서 신비로운 경지의 땅을 고르게 하는 공사를 착수하여 사계절 공원다운 공원이 되었다.'-<113~114쪽, 〃>

인용문은 일제 강점기 우암산 일대에 석불이 매우 많이 존재했고 벚나무 식재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음도 보여주고 있다. 청주 공원의 초기 역사는 이렇게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다. 서공원과 동공원 다음에 등장한 것이 중앙공원이고, 청주의 또 다른 명소인 상당공원은 비교적 늦은 1974년 5월에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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