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먹은 유수원, 영조와 붓으로 대화하다

처형당한 실학자 충주 유수원

2015.08.27 16:07:52

조혁연 대기자

유수원이 언제부터 귓병을 앓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나일 30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본격적인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조는 소론의 경세가인 유수원을 경상도사, 태천(지금의 평북)현감 등에 잇따라 임명했다.

그러나 유수원은 귓병과 노모 숙환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청각 상실로 인한 실의를 《우서》 저술 등으로 극복했다.

《우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수원의 또 다른 저서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이 있다. 관료 선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1741년(영조 17)에 쓰여졌다. 특히 그 내용이 탕평책과 관련돼 있으면서 영조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조는 유수원을 경연(經筵) 에 참석하게 했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유교 경전이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제도를 일컫는다. 영조와 유수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유수원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임금이 말을 하면 배석한 신하가 한자로 써서 유수원에게 보이고, 유수원 역시 답변을 붓으로 한자를 써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금이 유수원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의 조카로서 폐고(廢錮)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그의 재주와 학문이 기용할 만하다고 추천하였으므로, 임금이 입시(入侍)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유수원이 마침내 상소하여 그가 지은 관제서승도설을 바쳤는데….'-<영조실록 17년 2월 8일자>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

인용문의 유봉휘는 유수원 아버지의 사촌이 되는 인물로 소론의 지도자였다. 그는 연잉군(뒤에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또 영조의 탕평책 때는 좌·우의정 등을 역임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동자로 지목돼 결국 안흥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신임사화는 소론의 무고로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 노론 대신 4명이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조현명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던 인물이다. 그는 소론이기는 하나 비교적 온건한 주장을 펼쳐 완소로 분류된다.

필담이 시작되자 영조가 유수원에게 여러가지를 물었고, 크게 만족해 했다.

'임금이 칭찬하고 말하기를, "이 말은 옳으며 이 그림 또한 좋다. 만약 이 법과 같이 한다면 근래의 명관(名官)이 반드시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대신과 더불어 묘당에서 계책을 상의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이다." 하고, 비국 낭관으로 임명하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31년 5월 22일자>

영조는 그 직후 인사제도를 일부 개혁했다. 그 결과,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의 통청권과 한천법(翰薦法)은 각각 이조판서와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통청권은 이조전랑의 청요직 관리를 선발하는 권한, 한천법은 후임자를 선정해 놓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영조는'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문구를 친히 새겨 성균관 반수교 위에 세우고 '탕평비(蕩平碑)'라 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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