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그가 형장 이슬로 사라진지 2백60년

처형당한 실학자 충주 유수원

2015.09.17 17:37:24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육전조례 형전>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이 복주(=처형)되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

유수원의 입에서 성상(임금)을 비방하고, 신하를 욕하며, 나라를 원망했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자기 목숨을 체념한 것이 된다.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됐는지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유수원 답변에서도 성상을 비방한 직접적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음에 언급된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의 마음에서 말미암아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유수원이가장 하고 싶은 말은 '당준'이었다. 이는 '강한 당론', 즉 당시 집권당인 노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 번 권력을 잡은 노론은 다른 당은 물론 뿌리가 같은 소론도 철저히 배척했다.

유수원은 당준 때문에 나라를 원망했고, 원망하는 마음이 쌓여 패설하기에 이르게 됐다고 이단논법으로 마지막 답변을 했다. 유수원은 이 답변 후 곧 바로 처형됐다.

'대역 부도로 지만(遲晩)하여 정형하고, 법대로 노적(奴+子籍)하였다.'-<〃> 인용문 가운데 '지만'의 본래 의미는 '너무 늦어 미안하다', 혹은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이다.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문장으로, 그 앞에 '나의 죄'라는 표현이 생략돼 있다. 바로 '지만'은 '내 죄를 인정하는 것이 너무 늦어 미안하다' 또는 '내 죄를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미안함의 대상은 나라 혹은 임금이 된다. '노적'은 가족의 생명은 물론 재산까지 완전히 몰수해 폐고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가 태어난 충주목도 현으로 강등됐다. 이때 유수원은 61살로, 금년은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2백6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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