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역모 밀고자 조흥빈, 혼자 영달을 누리다

2015.10.15 15:33:24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인조실록 9년 2월 3일자>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변의 공으로 옥천현감이 상으로 주어졌다'라는 표현이 보이나, 조흥빈은 결국 회인현감에 임명됐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내용을 인조 정부에 고변하면서 옥천 역사이래 최대의 참상이 일어났다.

《인조실록》 같은 날짜에는 "공청감사(公淸監司) 정효성(鄭孝成)이 또 공주인(公州人) 한설(韓渫)이 고변한 것을 치계하였는데, 대체로 조흥빈이 고변한 내용과 같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조흥빈이 당시 충청감사(=공청감사)인 정효성에게 이를 먼저 고변했고, 그런 연후에 '정원'으로 불려 올라가 관련 사실을 고변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정원은 승정원의 또 다른 호칭으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한다.

역모가 사실로 드러난 만큼 인조 조정은 고변자 조흥빈에게는 포상 절차에 들어갔다. 당시 조정은 "조흥빈을 옥천현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고변한 공으로 상을 내린 것이다"라며 거주지의 수령으로 발령내려 하였다.

그러자 사헌부, 사간원 등 이른바 양사가 팔을 걷고 나서 이를 반대하였다.

"양사가, 흥빈에게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본읍에 임명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고을 이민(吏民)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간쟁하자 이에 다른 고을로 바꿔 임명하였다."-<인조실록 9년 2월 20일자>

조선시대에는 상피제가 존재하였다. 행정이 정실에 좌우될 것을 우려해 고향 등 연고지로는 인사 발령을 내지 않았다. 인용문의 '본읍에 임명하는 것은 법례에 어긋난다'라는 표현은 이를 의식한 것이다.

'고을 이민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다'라는 표현은 당시 옥천지역의 민심을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신(조흥빈)의 고변으로 지역민 10여명이 희생됐는데 이민, 즉 지역 관리와 백성들이 따르겠는가"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논란끝에 조흥빈은 회인현감으로 발령났고(승정원일기 인조 9년 2월 25일), 또 권대진의 노비와 전택 등 절몰된 재산을 받는 등 그는 혼자서만 영달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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