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목성균作 '누비처네'
[충북일보]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이 가을, 수필가 박영수 선생이 권하는 고(故) 목성균 작가의 수필 '누비처네'의 이 한 장면을 가슴 벅차게 읽었다. 사업을 일으키려 서울서 고군분투하느라 아이가 백일이 되도록 고향의 제 첫 자식을 보지 못한 젊은 지아비, 그런 아들에게 추석 명절 때 손주의 포대기를 사오라고 소액환을 동봉하여 편지를 쓴 속 깊은 시아버지, 지아비가 사온 포대기(누비처네)로 아이를 둘러업고 푸른 달빛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 근친가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에는 가족의 결속, 자연의 서정, 인간의 도리, 우주적 삶의 이치가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작가의 진솔한 체험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유수의 작품들은 가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내내 삶을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위트와 재치 또한 잃어버리지 않았다. 피천득, 법정에 이어 목성균을 우리나라 3대 수필가로 꼽은 임헌영 문학평론가의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목성균 작가는 청주 출신으로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창과에서 수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전국학생문예작품공모에서 고등부 산문 1위로 입상하는 등 일찌감치 문명(文名)의 전조가 있었다. 박영수 선생과는 고등학교 재학 중 청주시 고교생들의 문예모임인 '푸른문 문학동호회'에서 활동을 같이 했다고 한다.
박영수 선생은 목성균 작가와의 잊지 못할 인연과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목선생이 작고하기 5개월 전인 2003년 12월, 내가 지도하고 있는 문화원 수필반의 문학 수업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만의 알토란 같은 수필 작법을 털어 놓았어요."
박영수 수필가
그가 전해주는 목성균 작가의 수필 작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수필 속에 허구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지만 뼈대가 바르면 조미료를 치듯 또 간을 맞추듯 들어갈 수 있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면 자신의 끼를 더욱 치열하게 발산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많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하다. 수필이 단순한 신변잡기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문학성이 중요하며 진솔해야 한다. 주제를 형상화할 때 오랫동안 다듬고 농축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매년 10월이면 청주 목련공원에 있는 목성균 작가의 묘소와 문학비를 찾는다는 박영수 선생은 그 자신 역시 명망 있는 수필가로서 목 작가에 대한 상찬에 아낌이 없다.
"그의 수필집 '명태에 관한 추억'이 나온 이후 전국의 작가들이 모이는 행사에 가면 작품이 너무 좋다며 '목성균 선생을 아느냐, 어떤 분이냐'는 질문 세례를 받곤 했어요. 부럽기도 하고 동향인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했지요."
목 작가는 57세 늦깎이로 등단했었지만 2004년 작고할 때까지 고향 청주를 지키며 10 여 년 동안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타계 전 세상의 마지막 선물처럼 제 22회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사후 뜨거운 조명을 받는다는 점에서 '수필계의 기형도'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유고 수필전집 '누비처네'에는 그가 남긴 수필 101편이 담겨 있다. 이 수필집은 인문학자 김경집 교수가 KBS 아침마당 목요특강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후부터 서점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도 전국 서점가에서 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청주는 수필의 고장입니다. 수필 강좌가 일반 시민들에게 인기이고 민병산 김태진 등 저명 수필가도 많아요. 이런 분들의 전통을 잘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목성균 작가의 '누비처네'가 청주시민들이 읽어야 할 도서로 선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영수 선생의 바람처럼 삶의 체험과 통찰이 깊이 발효된 그의 명수필을 우리 시민들이 읽는다면 문학의 향취와 더불어 고장에 대한 자부심까지 높일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 윤기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