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 남문광장 입구에는 이인좌의 난(무신란) 진압 과정을 기록한 '무신창의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②에 대해서는 "당초 안동지역 퇴계학파는 무신년(1728) 3월 10일 거병하기로 돼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불참한다"며 "여기에는 향촌사회에서 지배자적 위치를 고수하며 후일을 도모하자는 온건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논문은 ③에 대해 "변산반도의 도적 무리는 소문만 무성했지 실체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며 "따라서 이들과 연대하려던 호남반란군의 작전은 실패했고, 그 영향은 전주성 점령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서술했다.
④에 대해서는 "청주를 출발한 이인좌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전투에서 잇따라 패한다"며 "초보적인 무장을 한 반란군이 애초부터 중무장한 관군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논문은 ⑤에 대해 "청주읍성을 점령한 반군은 영남과 호남반군과의 연합을 위해 7일간 청주에 머물게 된다"며 "이는 관군에게 전열 정비의 시간이 됐다"고 서술했다.
이인좌를 생포한 중앙관군은 이후 청주지역으로 진군했으나, 상당산성과 청주읍성을 지키고 있던 '가병사(가짜병사)' 신천영 휘하의 잔여 반란군은 재지사족이 중심이 된 청주지역 의병(일명 무신창의)에 의해 이미 토벌된 뒤였다.
한편 고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무신란의 성격을 "서울지역의 소론준소가 반란을 시작하고 남인이 중심이 되어 실제 거병한 것"이라고 기술, 반란군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
/ 조혁연 객원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