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집, 숲 속 갤러리에서

2016.11.01 17:53:33

이정희

벽면에는 역대 도지사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일제 시대부터 도지사를 지낸 수많은 인물들의 거처인 관사를 보수해서 개방했다는 충북 문화관. 가을이면, 특별히 여기 찾아올 때는 늘 고즈넉한 기분이었다. 오늘도 뜰에는 수십 그루 나무가 단풍으로 가을을 스케치하는 중이다. 자잘한 풀도 가지가지 빛깔을 넣으면서 저마다의 느낌을 채색한다. 그 위에 바람기氣마저 소슬했으니 가을의 최고 풍류로 손색이 없다. 지금 있는 곳은 또 문화의 공간인 숲 속 갤러리였으니까.

건물 뒤쪽은 야외공연장과 문화의 집으로 연결되었다. 야외 공연장은 말 그대로 음악회와 연주회를 개최하는 곳이며 문화의 집은 충북 지역의 문인 홍명희 신채호 김득신 정지용을 비롯한 12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특별히 옛 도지사 공관으로 사용되던 문화의 집은 당시의 건축적 특징을 그대로 살려 두었다.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문화의 공간에서 역대 문인들의 자취를 돌아보는 마음이 오늘따라 묘하게 고즈넉했다.

그렇게 감상에 젖는데 갑자기 시끌시끌한 소리가 났다. 보나마나 선생님과 견학하러 온 학생들일 것이다. 곧 이어 예의 젊은 여선생 둘과 남녀 학생이 몰려 왔다. 둘은 일변 노트북을 켜는 등 준비를 끝내더니 곧 바로 강의를 시작할 참이었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나가주길 바랬을 것이지만 모른 체 내가 먼저 들어 왔으니 견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해 버렸다. 마땅치 않은 듯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는 여선생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다.

학생들을 생각하면 양보를 하고 싶어도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나 외에 두어 사람이 더 있었건만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독무대나 되는 듯 구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어긋난다. 양해를 구하면 즉, 학생들이 모처럼 견학을 왔으니 잠시 다른 곳부터 보고 오면 어떻겠느냐고 정중히 제안하면 자식을 둔 어른들이 못 들어줄 것도 아닌데 어찌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는 또 말 그대로 문화의 집이다. 자기들은 또 명색이 문화의 공간을 수소문해서 학생들에게 배경을 일러 주려고 왔는데 몇 몇이 견학을 하고 있으니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입장을 바꿔서 학생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문화의 현 주소를 추적하고 있는데 제 3자가 아무런 양해도 없이 멋대로 군다면 어떻게 나올지 그 또한 궁금했다.

얼마 후 우리가 나가자 두 여선생은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과 다시 들어왔다. 당연한 순서였으나 거기서 또 한 번 실망했다. 우리를 보고 아까는 저희가 실례를 했노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랬을지언정 돌아서서 깨우칠 수도 있으려니 한 것인데 가당치 않은 것을 기대한 폭이다. 그리 말할 사람 같으면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는 등 소정의 절차를 밟았을 테니까.

나로서는 아까 양보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도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여선생들 또한 내가 먼저 말하면 "아까는 저희도 경우를 모르고 실례했어요" 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데 어줍지 않게 경우만 따졌으니 그들 여선생이나 나나 각박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까지 서늘한 가을, 모처럼 맑고 깨끗한 풍경을 완상하고 싶어서 찾은 터수에 언짢은 기억 하나만 덧붙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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