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슬프고 아픈 계절이다

2016.11.08 14:50:48

박선예

수필가

올 가을은 가을답지 않다. 이전의 가을과는 사뭇 다르다. 가을은 풍요롭고 하염없이 깊어서, 사색하며 한해를 마무리하기 좋은 계절이었는데 올 가을은 답답하고 허탈하기만 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치욕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늘마저 무겁다. 구름 한 점 없던 공활한 가을 하늘을 기대하는 건 무리이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미세먼지나 중국 발 오염물질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역 부족이다. 이 모든 게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슬프니깐, 무얼 보든 시야가 우중충하리라.

날씨도 문제다. 추웠다가 더웠다가 오락가락이다. 화려하게 치장 중이던 가을 색들이 갑자기 빛을 잃었다. 아직 물들기 전인 은행잎들도 우수수 다 떨어져버리고 미처 붉은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단풍나무의 잎도 쪼글쪼글 말라가고 있다. 지난여름의 가뭄과 폭염 탓일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어쩜 자연도 알아 챈 건 아닐까· 지금 이곳에서 원칙을 지키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마치 가을도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이러려고 가을이 되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라고.

대통령의 첫 번째 사과가 있던 다음날이었다. 열흘일정으로 여행 중이던 여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언니 무슨 일 났어· 우리나라에 큰 일 터진 거야·"

놀란 목소리였다. 동생은 해외 토픽뉴스에 등장하는 우리 대통령의 모습에 너무 반가웠단다. 근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여 현지 가이드에 물었더니 누군가가 대통령을 움직였다고 얘기하더란다. 그게 궁금해서 전화했단다. 자초지종을 말하자 큰일은 아니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동생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여행은 즐거웠냐고 물었더니 요즘 아이들 말로 딱 한 마디 하겠단다.

"쪽 팔려서 죽는 줄 알았어!"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문이 발표된 후,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부끄러웠단다. 그곳 사람들이 쳐다보면 그만 주눅이 들더란다. 조종당한 대통령이 저 나라 대통령이라고 수군대는 것만 같더라나.

여동생은 그 대통령의 왕 팬이었다. 어디 동생뿐인가. 동생네는 시댁의 팔촌까지 그 대통령의 골수팬 집단이었다. 흰 것도 검다 하면 그대로 믿는. 그래서일까. 동생과 제부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단다. 허망하고 아프단다. 앞으로 이 나라를 책임지고 살아나갈 아이들을 쳐다 볼 면목조차 없단다.

충주 미륵리는 은행나무로 꽤 유명하다. 이미 잎이 다 져서 볼 폼은 없지만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아니. 저 은행나무는 왜 노란 은행도 있고 새까만 은행도 매달려 있지· 병에 걸렸나·"

관광객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이 혼잣말로 대꾸하신다.

"인연도 집착하면 악연이 되는 거지. 작년 가을에 죽자고 열매를 붙잡고 있더니만 그만 흉물이 되었구먼. 미련 때문에 때를 놓친 거지. 나무 관세음보살."

이제야 악다구니처럼 매달린 까만 은행의 정체를 알았다. 자연의 순리를 어긴 집착과 미련의 산물이라는 것을. 문득 은행나무의 한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이러려고 너를 붙든 건 아냐.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 떠나 줘.' 라고.

아, 이 가을에 그만 알고 말았다. 가을은 슬프고도 아픈 계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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