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과 '소'
한국인은 각자마다의 심성에 투영된 동물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처럼 인간의 본성에는 동물적인 근성이 있다. 다만 12띠 동물 중 어느 동물의 수심(獸心)을 가졌는가가 다를 뿐이다.
'띠'란 동물의 환대(環帶)를 의미하는데 이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로 이어지는 날(日)이나 달(月)·연(年)의 고리를 의미한다.
올해는 축(丑)에 해당하는 소의 해다. 예부터 소는 우리나라 농경사회에 없어서 안 될 가축이었다. 농사를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노동력이었고 일상생활에서는 운송수단, 또는 목돈을 마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라고 보아지는 알타미라 동굴의 소의 벽화는 인류가 소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3년(502)에 처음 우경을 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우경은 이보다 오래 전부터 시작돼 2천여년 이상 우리민족과 한반도에서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소는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재산으로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짐승이긴 하나 식구처럼 대하게 됐다. 그래서 소에 대한 여러가지 민속도 생겨나게 됐다. 소의 무병장수를 비는 '소놀이굿'이라든지, 힘센 소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소싸움 놀이'같은 것이 오랜 역사를 지닌 채 전승되고 있다.
소는 농경이나 소싸움놀이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종교나 예술의 대상으로서도 훌륭한 소재가 됐다. 불교에서 심우도(尋牛圖)는 소를 찾는 10단계의 그림으로 주된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득도의 상징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소가 그림의 소재로서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소를 신성시한 인간의 심성에서도 비롯되지만, 소의 역동적인 모습이 예술적인 멋을 표현하는 데에도 적당하기 때문이다.
소에 얽힌 속담이나 설화도 많다. 이것은 소와 인간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소와의 생활이 역사적으로 오래됐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 속담에 얽힌 소 이야기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소와 생활해 왔기 때문에 소와 관련된 속담이 많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음식을 천천히 많이 먹는 것에 비유한 '소같이 먹는다' 또는 서로 무관심하게 보는 것에 비유한 '소 닭 보 듯, 닭 소 보 듯한다', 말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소 귀에 경 읽기' 먹이를 주어도 바로 못 챙겨 먹는다. 즉, 우둔하다는 뜻의 '소 궁둥이에 꼴 던지기', 소의 몸체가 크다고 해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없다는 '소가 크면 왕 노릇하랴?' 등이 있다.
이외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일이 잘못되고 나서 손을 쓴다는 뜻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 △소장수 닭싸움한다 : 큰 사람들이 작은일로 시비를 벌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 무슨 일이든 단숨에(당장에)해 치운다 △소일 때는 일도 많다 : 부지런한 사람은 할 일도 많다 △소 귀를 삶아 먹으면 정직해진다 : 소는 아무리 비밀스런 말이나 나쁜 소리를 해도 옮기지 않는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 눈에 띄게 못된 일을 하는 경우를 뜻하는 속담이 있다.
# 설화에 다양한 의미로 등장하는 '소'
△황희 정승의 질문
어느 날 황희 정승이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그 옆의 밭에서 두 마리의 황소를 부리며 열심히 밭을 가는 농부가 있었다. 한 놈은 검정 소이고, 또 한 놈은 누런 황소였다. 황희 정승은 순간적으로 의문이 생겼다. 저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느 이 더 일을 잘 할까? 그래서 황 정승은 소리쳐 농부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농부님 당신의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합니까?"
그러나 농부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후 농부가 밭가에까지 다달았을 때 슬그머니 황 정승 앞으로 다가와서 귀에다 대고 소근거렸다.
"일을 검정 소가 잘 합니다만 그 소리를 큰 소리로 말한다면 아무리 짐승이라 할지라도 누른 소가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습니까? 소도 자기를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이 소리를 들은 황희 정승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농사짓는 농부라 할지라도 배려 깊은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소와 관련된 민속놀이
우리 민족은 농경을 주된 생업으로 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소와 관련된 민속놀이가 많다. 유명하게 알려진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영산 쇠머리대기
서까래로 소의 머리처럼 얽어 만든, 가로 4.0m, 높이 3.3m, 길이 6.3m의 나무 쇠머리를 동·서부군이 울러 메고 격돌하는 놀이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해마다 3월 1일에 이 민속놀이를 전 주민이 참여하에 열렬하게 치러 내고 있다.
△ 밀양 백중놀이
밀양 지방에서는 7월 백중날 머슴들이 세벌 논매기를 마친 후 넓은 벌판에서 '꼼배기참'이란 음식과 술을 마련해 놓고 성대하게 놀아댄다. 이때 좌상으로 뽑힌 머슴이 소를 타고 모든 머슴들의 축하를 받으며 재미있게 논다.
△ 양주 소놀이굿
경기도 양주 지방에서 전래되어 오는 민속놀이로서, 짚이나 멍석을 이용하여 소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대여섯 사람이 들어가 소처럼 꾸며 움직인다. 이들은 마부와 무당과 함께 풍악을 울리고 재담을 하며 재미있게 논다. 이 소를 몰고 남의 집을 방문하여 풍악을 울리면 술과 음식도 나오고 돈을 내놓는 집도 있다.
△ 소싸움 놀이
소를 이용한 일반 민속놀이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싸움 놀이이다. 이 놀이를 투우놀이라고도 했는데, 주로 추석을 쇤 후 추석뒷놀이로 중부 이남 지방에서 많이 했던 놀이이다. 호남쪽보다 영남지방에서 더 성행했다.
△ 윷놀이에서 윷은 '소'
윷놀이는 우리나라 정월 놀이의 대표적인 것이다. 이 놀이는 실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할 수 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원수에 제한 없이 할 수 있다.
윷놀이에서 '윷'은 소를 말한다. 짐승의 명칭을 따서 말을 정하여 노는 이 말판놀이는 점수가 제일 높은 것이 짐승 중에 제일 잘 뛰는 말이고, 그 다음이 '윷' 즉 소인데, 소가 말처럼 잘 뛰지도 못하는 데에도 두 번째로 높은 점수를 준 것은 우리민족이 소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았다는 간접적인 반증이 된다.
이제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소의 힘을 빌릴 일이 거의 없어졌다. 산골짜기의 계단식 논밭 말고는 소의 노동을 거의 기계가 해 내기 때문이다.
2009년 기축년을 맞아 인간과 소 사이에 말없이 수수되던 훈훈한 정(情)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자.
/ 김수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