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전투서 혼자 살아남은 장수

2010.05.04 20:24:06

실록의 표현을 빌면, 왜군들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달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희립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사했다.

그 와중에 사잇길로 도망을 쳐 살아남은 장수가 있었다. 순변사에 임명됐던 이일(李鎰·1538∼1601)이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제 1군은 파죽지세로 밀양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조선 조성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 급히 경북지역으로 파견한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임시로 단기간 파견되는 특사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이때의 조정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청대하였으나 (임금은)비답하지 않았다. 계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냈다. (…)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청대'는 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을, '비답'은 임금이 가부의 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이일은 북상하는 왜적을 맞아 상주에서 싸우다 크게 패배, 충주로 도망했다. 실록의 표현을 빌자면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말을 달려 도망했다'. 그리고 문경을 거쳐 도순변사 신립이 이끄는 충주 진영에 합류했다. 계급이 한 단계 높았던 신립이 이런 이일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립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립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었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저상'은 기운을 잃는다는 뜻이다.

이일은 탄금대 전투에서도 장수의 몸으로 도망했다. 실록은 이 부분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장사(壯士)로서 빠져나온 사람은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치계는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수로서 대패했고 그것도 도망친 이일이 살아남은 까닭이 있었다. 바로 앞선 언급한 '수급', 즉 왜군의 머리를 서울로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병조는 이일이 충주에서 가져온 왜군의 머리를 사람의 왕래가 많은 남쪽 성문에 매달았다. 이일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무신 고위직에 오르는 등 영달을 누렸다. 그러나 말로는 좋지 않았다. 함경남병사로 있을 때 개인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하를 살해했다. 그 죄로 서울로 호송되던 중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죽었다. 그러자 당시 사관은 이일의 졸기를 다음과 같은 사론으로 썼다.

'이일은 국가의 큰 은혜를 받고서도 털끝 만큼도 보답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임진년 난리 때는 가는 곳마다 패배하였고 사납고 음험한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 심했다'. 사론은 사관의 개인적인 평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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