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사돈, 청주출신 한확

2010.05.25 17:43:50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김종서 부자, 황보인, 허후 등을 제거한 사건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계유정난과 관련, 1등 공신에 오른 인물 중에 한확(韓確·1403~1456)이 있다. 그가 계유정난 때 어떤 역활을 했는지는 사료 상으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정난공신 1등'에 오른 것으로 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즉위식 때 그의 위치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백관을 데리고 세조에게 인사를 올린 인물이 한확이었다. 백관은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이때 한확은 백관의 대표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사직(社稷)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다 같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하게도 경사로운 때를 맞아, 저 서기(瑞氣) 어린 해와 구름 속에 천명(天命)도 새로운 거룩한 성대(盛大)를 얻어 보고 태산(泰山)과 반석(盤石) 같은 바탕에서 다시 무강(無彊)하신 큰 계책을 기대하는 바입니다."(세조실록)
 
세조와 한확의 이런 교분은 '사돈'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세조 장남 도원군(20세 요절)은 한확의 딸 수빈한씨를 아내로 맞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인수대비, 즉 성종의 어머니가 바로 수빈한씨다. 어느날 사정전에서 '상참'(常參)이 열렸다. 상참은 당상관 이상 대신들이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를 말한다. 세조는 이날 기분이 좋았는지 흠뻑 취한 모습을 보인다. 역시 세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늘은 즐거움이 지극히 흡족하니, 따로 잔치를 베풀 것 없이 마음껏 취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매사에 네 장인의 말을 따르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하니, 장인은 곧 좌의정 한확(韓確)이었다.(…) 임금이 술이 취하여 비파(琵琶)를 잡고 일어나 춤을 추니, 대신도 또한 모두 일어나 춤추었다'.
 
대권을 잡은 세조에게 한 가지 고민거리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왕위 등극이 찬탈이 아닌, 단종의 자발적인 양위였음을 명나라에게 설명하고 또 추인을 받아내는 것이 절실했다.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한 인물이 바로 한확이다.
 
한확의 누이와 여동생은 공녀로 출발해, 보기 드물게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후궁이 됐다. 때문에 한확 자신도 외척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역임하다 귀국한 바 있다. 한확의 이런 이력은 대명나라 외교사절로는 적격이었다. 한확은 성공적인 외교 노력을 전개, 명나라로부터 '찬탈이 아니고 단종의 자발적인 양위'였음을 인정받았다. 한확은 그러나 귀국도중 병을 얻어 요동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2살이었다. 슬퍼하는 세조의 모습이 실록에 실려 있다.
 
'고명 사은사로 명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와 칠가령에 이르러 병을 얻어 가사에 대하여 한 말도 하지 않고 사하포에 이르러 죽었다. 부음이 들리매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어 압록강 위에서 널(板)을 맞고, 도승지 한명회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호송하게 하였다'.

한확은 우리고장 청주 출신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자의 장인에게 '부원군'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그의 호칭은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었다. 이때의 '서원'은 청주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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