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인 한명회, 세조를 만나다

2010.05.30 16:45:01

조혁연 대기자

계유정난(1453)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수양대군(1417~1468),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洪達孫) 등 4명이다. 수양대군(세조)은 신권이 왕권보다 커지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군' 자격으로 매월 한번씩 단종을 만날 수 있기를 요청하나 김종서, 황보인 등으로 구성된 의정부로부터 거부를 당한다.

'세조가 아뢰기를, "여러 종친을 모실 길이 없으니 매월에 한 번씩 만나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여,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주상(단종)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어리시고, 상제(喪制)를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며, 또 접견할 곳이 없으니, 아직 전례에 의하여 영해군(寧海君) 이상과 영자(寧字) 이상의 대군(大君)만 인견(引見)하고, 그 나머지 종친은 뒤에 사현(賜見)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수양대군은 병서(兵書)를 함께 편찬한 것이 계기가 돼 권람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수시로 권람에게 털어놨다. 당시 권람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둘은 당시 조정에 대해 공동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세조가 앞으로 다가앉아 말하기를, "자네는 틀림없이 나의 마음을 안다. 나의 동정(動靜)이 실로 어렵다" 하였다'.(〃) 이때의 '자네'는 권람을 의미하고 있다.

권람이 언제부터 한명회와 교분이 있었는지는 사료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연려실기술에는 '젊을 때부터 글읽기는 좋아하며(…) 반드시 한명회와 더불어 함께 다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로 미뤄 두 사람 사이는 어려서부터 집안 관계로 교분이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권람은 이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다.

'권람이 세조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모름지기 장사로서 사생(死生)을 부탁할 만한 자 두어 사람을 얻어서 창졸(倉卒)의 변에 대비하소서"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이는 매우 좋다. 그러나 가히 장사를 얻게 해 줄 만한 자가 누구인가" 하므로, 권람이 말하기를, "한명회가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수양대군을 만난 한명회는 초면부터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反正을 한 뒤에야 그 어려움이 형통해 지니…"와 같은 말을 한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속내를 사전에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양대군의 확고함을 안 한명회는 그에게 계유정난 행동대원으로 홍달손 등 30여명의 무인을 천거한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한다.

'무부(武夫)는 비천한 사람이지만 공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진퇴에 오직 명을 따르고 두 마음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한명회와 권람은 우리고장 충북과 큰 인연을 맺고 있다. 실록은 한명회에 대해 '청주인(淸州人)이며, 어머니 이씨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낳았다. (…) 권람과 더불어 망형우(忘形友) 를 맺고, 아름다운 산이나 수려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함께 가서'라고 쓰고 있다.

'망형우'는 용모나 지위 등을 문제삼지 않고 마음으로 사귀어 교제하는 벗을 일컫는다. 권람의 묘는 음성권 생극면 방축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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