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에 운명이 엇갈린 충북인물

2010.05.31 18:30:57

조혁연 대기자

단종 왕위찬탈의 서막인 계유정난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도에 비밀이 새나가면서 수양대군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한명회와 무인 홍윤성이 다음과 같은 말로, 거사를 행동으로 옮길 것을 재촉한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단종실록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의 마지막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에 이르러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고, 김종서가 이를 달에 비춰 읽어보려는 순간 종 임어을운이 철퇴를 내리쳤다. 그러자 김종서 아들 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렸고, 이번에는 무인 양정이 칼을 뽑았다. 그러나 김종서는 곧 바로 죽지는 않았다.

'김종서는 숨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서 원구를 시켜 성문지기를 큰 소리로 불러 정부에 가서, "정승이 밤새 남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으니 빨리 임금께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고하라"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 김종서가 김승규의 방안에 숨었으므로 끌어내었다. 김종서는 "내가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을 불러오너라."고 하였으나, 말도 마치기 전에 베어 죽였다'.(〃)

단종실록은 뒤이어 궁궐에서 벌어진 살육극에 대해 살생부 존재 여부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누구 누구가 죽었다' 정도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은 '살생부'라는 표현과 함께 어떤 방법으로 대신들을 살해했는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군사를 세 겹으로 짜 세워서 세 겹 문을 만들고 한명회는 생살부를 가지고 문의 안쪽에 앉았다. 여러 재신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는데 첫째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들을 떼고,둘째 문에 들어오면 그 이름이 생살부에 실렸으면 홍윤성·유수·구치관 등이 쇠몽둥이를 들고 때려죽이니, 황보인·조극관·이양 등 죽은 이가 너무나 많았다'.

이날 궁궐에 들어오지 않은 대신은 '찾아가서 죽이거나', 귀양보내진 후 살해됐다. 역시 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사람을 보내서 윤처공 등을 죽이고, 민신을 현릉 비석소(顯陵碑石所)에서 죽였다. (…) 허후를 거제에 안치시켰다가 조금 뒤에 사사하였다'.

공포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됐다. 단종은 이런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삼촌 수양대군을 영의정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왕위까지 내주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종의 말이다.

'숙부가 없었던들 내 어찌 이날이 있었으리오. 이에 충성을 대우하여 장상(將相)을 겸하여 맡게 하노라. (…) 진실로 어린 임금을 맡기고 나라를 맡길 수 있는 사직의 중신이라 하겠다'.(〃)

계유정난과 관련해 우리고장 충북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충북과 인연이 없었으나 후대에 인연을 맺은 인물도 있다. 한명회, 권람, 신숙주, 정인지, 정분, 한확, 허후 등이 그들이다. 한명회가 작성한 명부에 따라 살(殺)과 생(生)의 운명이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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