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신숙주 그리고 청원낭성

2010.06.06 18:44:34

조혁연 대기자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이 집현전 학자로 선발됐다. 세종은 이들을 국가두뇌로 키우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책이 간행되면 이들에게 먼저 지급하며 '학문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專業學術 期以終身)고 말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집현전 '동기' 중 유난히 친했다. 신숙주가 1417년, 성삼문이 1418년생으로, 나이가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계유정난 관련, 각각 2등과 3등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에 책록됐다고 해서 정난에 직접 가담한 것 같지는 않다. 사료에는 이들의 활약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든 대신들은 내칠 수 없는 만큼 무언의 지지자도 공신에 올린 것으로 여겨진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여기까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이후부터는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사람, 성삼문은 단종의 사람이 돼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길에 신숙주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명나라 동행을 강력히 청한 결과였다. 사은사는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을, 서장관은 일행에 포함된 외교 실무자를 일컫는다. 이 부분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마침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가 문 앞으로 지나갔다. 세조가 부르기를, "신 수찬(申修撰)"

하니, 신숙주가 곧 말에서 내려 뵈었다. 세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 하는가" 하고,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의 수중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하므로, 세조가 즉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중국으로나 가자" 하였다'.(단종실록)

'과문불입'은 문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는 것을, '재가부지'는 집에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세조는 신숙주를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칭할 정도로 신임했다. 위징은 당태종 때의 명신을 말한다. 세조는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신숙주에게 건네기도 했다.

'술잔의 겉면에는 박 덩굴에 박이 매달려 있는 형상을 그리고, 안쪽에는 임금이 친히 지은 시를 썼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경이 비록 나를 보고 웃을 것이나 / 내 박이 이미 익었으니 / 쪼개서 잔을 만들었다'. (세조실록)

이광수가 '단종애사'에서 '신숙주가 사육신 사건 때 변절하였음으로 그의 부인 윤씨가 면전에서 자결했다'는 식으로 포현했. 이후 신숙주는 '숙주나물'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종종 변절자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은 다르다. 부인 윤씨는 사육신 사건 1년전 자연사했다.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 신숙주 위패를 모신 '묵정영당'(도유형문화재 제 108호)이 존재한다. 신숙주는 본래 전남 나주사람이다. 그럼에도 청원 낭성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신숙주는 여러 명의 아들을 뒀다. 그중 세 아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누대에 걸쳐 세거했다. 이들을 청주 상당산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산동(山東) 신씨'라 부른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신홍식, 신규식이 그 후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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