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이 유배자 명단에서 제외, 충주 이연경

2010.10.31 20:44:49

조혁연 대기자

중종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국문받을 때에 한 짓도 죽을 만하다. 또 조광조가 시종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도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데 그 마음이 곧지 않으며, 김정은 우혹(愚惑)하다"하매…'-<중종실록>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전남 화순)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하명이 내려졌다. 여러 사료가 이 부분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보인다.

'드디어 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조르려 하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하찮은 신하의 머리를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고 더욱 독한 약을 마시고 드러누워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으니, 바로 12월 20일로…'.-<연려실기술>

조광조의 시신은 죽어에도 바로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한 계절을 건천에서 보낸 끝에 이듬해 봄에야 안장됐다. '소 수레로 관을 용인으로 옮겨다가 이듬해 봄 선산인 심곡리에 장사 지냈다. 성수침, 홍봉세, 이충건 등이 장사에 달려 왔고, 이연경도 또한 와서 제사지내고 잔을 드리고 서로 붙들고 크게 통곡하고 돌아갔다.'-<연려실기술>

내용 중에 이연경(李延慶·1484~1548)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는 갑자사화 때 사약은 운반한 죄로 사사된 이세좌의 손자이다. 조광조는 이런 그를 현량과 제도를 통해 관료로 천거했다. 누가 봐도 조광조의 사람의 당인(黨人)이다. 당연히 이연경도 남곤 등 훈구파에 의해 처벌자 명단에 포함됐다.

'이항 등이 황지(黃紙)를 인명 위에 붙이는 일을 끝내고 곧 단자(單子)를 만들어 올렸다. 황지가 이름 위에 붙은 자는 안당·김안국·최숙생·유운·유용근·정응·최산두·이희민·양팽손·이연경·이약빙·윤광령·이충건·조광좌·송호례·송호지·정완 등 17인인데 대사헌 이항이 주관하였다.

황지는 말 그대로 누런색 종이라는 뜻으로, 임금에게 어떤 보고를 할 때 이 종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연경은 마지막 순간에 중종에 의해 유배자 명단에서 제외, 기묘사화의 화를 면하게 된다.

'공의 이름도 그 중에 있었다. 임금이 붓으로 지워버리면서, "모(某)의 사람됨은 내가 안다. 다만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때에 공은 시골로 돌아가서 스스로 탄수라 호(號)하고 낚시질로 즐겼다.'-<기묘록보유>

이때의 시골은 충주 복촌을 일컫는다. 이후 그는 평시서령이라는 관직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인종 1)에는 현량과가 되살아났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병으로 죽자 이황이 비문을 썼다.

'무신년에 충주 사제(私第)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갈에는, "능히 무너지는 세파(世波) 속에 우뚝하게 자립하였고, 끝까지 변하지 않아서 기묘사화에서도 무사하였다. 퇴계가 지었다'.-<기묘록보유> 본문중 사제는 농막의 일종을 말한다. 그의 위패가 충주 팔봉서원에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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