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한시를 남기다, 조광조 절친 박상

2010.11.25 18:16:42

조혁연 대기자

중종의 정비는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로, 신수근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그와 결혼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중종반정과 함께 성희안(成希顔) 등 반정 추진파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반대한 이유는 연산군이 그에게 매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단경왕후도 단순히 혈연적인 이유로 정비 자리에서 폐위돼 본가로 쫓겨났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2백년 가까운 영조 때가 되서야 왕후로 복위됐다.
 
1515년 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이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김정은 전회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우리고장 보은출신이다.
 
'지금 내정(內政)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愼氏)를 곤후(坤后)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중종실록>
 
본문 중 '곤후'는 왕후를 말한다. 앞서 조광조를 거론한 이유가 있다. 상소문을 본 조광조가 둘을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 이는 세 사람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정언(正言) 조광조가 아뢰기를, "근자에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구언(求言)에 따라 진언하였는데, 그 말이 지나친 듯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어찌하여 다시 죄줍니까· 대간이 그것을 그르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여 금부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잡아오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중종실록>
 
본문중 '구언'은 상소의 반대개념으로 임금이 신하에에 의견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실록을 보면 이날 조광조는 같은 내용을 세번이나 반복해서 상소하고 중종은 이를 다소 짜증섞인 말투로 되받는다. 아마 이때부터 중종이 조광조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교하기를, "그때의 대간 중에는 외방으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역시 그르다 하지 않고서 서로 용납하였는데, 어찌 정언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가" 하매, 세번째 아뢰기를…'-<중종실록>
 
박상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역(烏林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고, 조광조는 상소 내용이 과격하다고 해서 또 다른 상소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갑자사화 시발점의 하나가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칭병을 이유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문장 활동에 주력하면서 성현, 신광한, 황정욱, 등과 함께 서거정 이후의 4가(四家)로 꼽히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이 아닌 전남 광주인이나 외직으로 충주목사를 지냈다. 그가 재직중 탄금대를 올랐던 모양이다. 이때 남긴 '탄금대'라는 칠언율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지난 일 아득해 가히 찾을 수 없는데 / 탄금대 아래 강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문장 강수는 무덤마저 없어졌고 / 명필 김생도 유허지만 남았구나 / 해 떨어진 강 위엔 쌍쌍한 배 한들거리고 /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엔 해오라기 오순도순 / 아가야 뱃노래 부르지 마라 / 태수가 듣고 오면 얼굴이 부끄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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