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다, 청원현도 정렴

2010.11.28 17:50:05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고려말기 혁명파들은 불교를 비판했다. 특히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은 정도전이 가장 혹독하게 불교를 비난했다. 이때의 '불씨'는 석가모니를 의미한다.

고려 말기 혁명파들이 불교를 공격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절(寺)은 '사찰경제'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쥐고 있었다. 당시 혁명파는 이 경제력을 빼앗기 위해 사찰을 공격했다.

따라서 조선전기 서원(書院)은 절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백운동 서원의 후신)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본래 숙영사(宿永寺)라는 절터였다. 소수서원 입구에 서있는 당간지주(보물 제 59호)가 이를 증명한다.

조선의 3대 기인으로는 대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 북창 정렴 등이 꼽히고 있다. 이중 정렴(1506~1549)은 천문·의학·복서·그림 등 모든 방면에 두루 뛰어났다.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실록에 남겨져 있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옛날에 정염이란 자가 있어 심통술(心通術)을 얻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사람이 의술을 잘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학문의 공도 있었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점은 듣지 못했고 점을 잘 치고 의술을 잘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합니다" 하였다.'-<선조실록>

정렴이 의술에 뛰어났다는 사실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이 지은 기재잡기(寄齋雜記)라는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그는 인조 임금의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 일종의 어의(御醫)였던 셈이다.

'인종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을 때 정승 권철(權轍)이 사인으로 공사를 가지고 이상 윤임(尹任)에게 갔었는데 마침 대명전 마루에서 단령을 벗고 누워서 자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 물러나왔다. 북창 정렴이 내의의 여러 제조들과 들어가 진찰해 보니, 상감의 병세가 벌써 숨이 가물가물하고 있는데…'-<기재잡기>

그러나 그의 박학다식함과 벼슬에 비해 그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적게 남아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아버지 정순붕(鄭順朋·1484~1548)과 시국관이 크게 달랐다.

정순붕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윤원형(尹元衡) 등과 함께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약한 인물이다. 을사사화의 중심적인 인물인 셈이다. 정렴은 아버지가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보내자 벼슬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에 기록이 많지 않은 이유가 된다.

'그 아버지가 을사년에 고변을 올릴 적에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고 인하여 크게 거슬려서 집에 용납되지 못하고 과천 청계산, 양주 괘라리에 많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으니, 나이 40 남짓하였다.'-<동각잡기>

정렴이 우리고장과 인연을 나누고 있다. 그의 위패가 청원군 현도 노봉서원에 봉안돼 있었다. 1615년(광해군)에 건립된 이 서원은 청원군 최초였으나 고종 2년(1865)에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서원터는 본래는 석암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서두에 절터와 서원 관계를 장황스럽게 설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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