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객관에서 죽다, 강골 이사균

2010.12.07 16:26:02

조혁연 대기자

관찰사는 조선시대 때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말단행정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사료는 관찰사로 있으면서 토목공사를 자주 한 인물로 이사균(李思鈞·1471∼1536)을 종종 거론하고 있다.

'금상 19년에 사창(社倉)을 창설하였다.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하므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본문에 등장하는 마점고개는 전남 영광군에 위치하고 있다. 그가 조선시대식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는지 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성품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좋아해서 관직에 있을 때 늘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이것이 그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다.'-<중종실록>

기묘사화와 관련, 전회에 우리고장 청원옥산 인물인 박훈(朴薰·1484∼1540)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균도 이 시대 인물로, 박훈과 이런저런 사연을 만들고 있다. 이사균이 기묘사화로 귀양길에 오른 박훈을 중도에 만났던 모양이다.

'승지로 임명되어 돌아오다가 박훈과 기준(奇遵)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는 도중 갈원(葛院)에서 서로 만났다.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하다가 시사(時事)에 언급되었을 때 사균이 "자네들에게는 진정 간사한 마음은 없었고 나이가 어려 경험이 부족한 탓일 뿐이다."'-<중종실록>

이사균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정이 이렇게 하면 안된다"라는 말까지 말하고 있다. 이때의 조정은 중종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 자네들을 귀양보냈다가 지혜와 능력을 양성시켜 후일에 크게 쓰려고 한다면 독이 되겠지만, 모조리 잡아들여 벌주고 내쫓고 해서 지나치게 미워하고 있으니, 자네들이 비록 죄를 졌더라도 조정이 사대부를 대하는 도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중종실록>

그가 박훈 등에 한 말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사균은 중앙 무대로 복귀하자 마자 이를 직접 거론했다. '임금이 어두워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신은 저들의 본심은 착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나라와 송나라 때에 서로 공격한 것은 죄다 소인이 아니라 군자가 군자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때는 임금이 어두워서 그랬으니 슬픈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중종실록>

앞서 이사균은 폐비윤씨(연산군 어머니) 복위를 반대하다 우리고장 보은으로 유배된 적이 있다. 그는 기묘명현에 대한 직언으로 또 다시 좌천됐다. 강골 기질의 이사균은 이런 부침을 거듭한 끝에 우리고장 충주에서 졸했다.

'공이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서 소환되자, 중한 견책(譴責)을 받게 될까 의심하여 걱정하고 분하게 여기다가 등창이 나서 충주(忠州) 객관에서 죽었다. 향년(享年) 68세였다.'-<기묘록보유>

당시 사관은 이런 이사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졸기를 썼다.

'기상이 남에게 굽힐 줄 몰랐고 문무(文武)를 겸비해서 대장부의 뜻과 기개을 지녔으며, 잗달고 번거로운 것은 싫어했고, 당시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권세를 잡은 자가 미워하기도 했다.'-<중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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