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가 크게 엇갈리다, 음성 김자수

2010.12.26 18:14:27

조혁연 대기자

악성 박연의 스승으로 고려말 문신인 김자수( 金自粹·?~?)라는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조선전기 학자인 김세필(金世弼)이 그의 고손(증손자의 아들)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엇갈리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그를 고려에 절개를 지킨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연려실기술>

본문에 등장하는 광주는 전남이 아닌 경기도 광주를 의미한다. 또 연려실기술은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를 인용, 김자수가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라는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김자수가 태조와 태종 등 두 임금을 섬기며 청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고 썼다.

'청주 목사 김자수가 연사(年事)가 흉년이 든 이유로써 감사에게 글로 진술하여 금년의 맥세(麥稅)를 면제해 주기를 청하여 말하였다.'-<태조실록> 당시 청주에 가뭄이 매우 심하게 들었던 모양이다. 김자수는 '맹렬한 가뭄에 백성들의 배워주지 못하면'라는 내용의 상소로 맥세 면제를 요청했다.

'(…)비록 한 달씩 걸러 한 번 비가 왔으나 흙에 들어감이 두서너 치(寸)에 미치지 못하고, 가뭄의 맹렬함이 날마다 더 심하니, 이 까닭으로 보리·밀의 열매가 모두 감손(減損)되었습니다. 지금 굶주린 백성이 슬피 울면서 먹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 배를 채워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을 밭갈이의 종자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태조실록>

인용글은 김자수가 절개를 지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위하여 적극적인 행정을 펼친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른바 연호미법(煙戶米法) 상소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연호미법은 흉년에 대비하기 위하여 평시에 백성들로부터 미곡(米穀)을 징수하던 제도를 말한다. 이런 유형의 제도에는 곧잘 탐관오리의 농간이 등장한다. 김자수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연호미법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것도 우리고장 충주와 청주의 사례를 들고 있다.

'우선 충주·청주의 두 고을로 본다면, 청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3천 9백 80결(結)인데, 더 늘어난 것이 5천 70결이고, 충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6천 1백 70결인데, 더 늘어난 것이 4천 5백 70결이니, (…) 이것은 탈루(脫漏)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또 연호미(煙戶米)를 거두게 되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태종실록>

고려에 절개를 지켰는가, 안 지켰나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청주에서 위민행정을 펼친 유능한 관료의 한 명이었다. 그의 위패가 음성 지천서원에 모셔져 있고, 그의 사후 경주김씨가 음성지역에 세거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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