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사당이 존재하는 까닭, 영동읍 당곡리

2010.12.30 18:23:42

조혁연 대기자

관우(關羽,?~219)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조조도 일찌기 그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신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이미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러자 조조가 "사람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정부가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자국내 민간신앙을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관우의 고향 산시성(山西省) 윈청시가 최근 관우 민간신앙인 '관공신속(關公信俗)'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키로 하고 모든 신청 준비를 마쳤다.

우리고장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도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십이장신당(十二將神堂·충북민속자료 제 2호)이 존재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 그것도 실존했던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기원후 3세기 때 관우가 손권 군사에 의해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처형당하자 중국 민간인 사이에서 그에 대한 신격화 움직임이 일어났다. 후대 쓰여진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기행문에서 당시 중국인의 관우 숭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5월 13일 묘에 크게 제사를 드렸는데, 이날이 관왕의 생신이라고 하였다. 만약 뇌풍(雷風)의 이변이 있으면 신이 이른 징조라고 했다. (…) 오후에는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일어나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고 뇌우가 함께 오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왕신(王神)이 강림하였다"고 하였다.'-<서애선생문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했다. 그들도 전쟁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관우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이기기를 기원했고, 따라서 오래 주둔하는 곳에 사당을 세우고 관우의 혼이 왕림하기를 빌었다.

이 모습이 조선군 사이에는 물론 민간신앙으로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조선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데 '관우 이야기'와 그에 따른 기적담이 활용됐다.

'문득 남대문으로 오색 구름이 일어나며 일원대장이 억만 대병을 거느리고 왜진을 헤쳐 우뢰같은 소리를 지르며 청정(加藤淸正 지칭)을 불러 왈: "우리 조선국은 사직이 사백년이 넉넉하거늘 너는 방자히 천운을 모르고 (…) 바삐 물러가라. 나는 삼국적 관운장이라" 하여 청정이 대경하여 바라보니'-<임진록>

임란이 끝나자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던 선조는 관우사당을 세우는 일에 열을 올렸다. 농사철이 시작됐으니 공기를 늦추자는 신하 의견에도 불구하고 사당 공사를 밀어붙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왕묘는 어찌하여 아직껏 완성하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 희서가 아뢰기를, "남묘(南廟)의 역사에 비해 훨씬 거창합니다. 농사철이 다가왔으니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문(衙門)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중지하기는 어렵다."'-<선조실록>

관우를 주신으로 한 삼국지연의 12장신을 모신 영동 십이장신당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워졌다. 이후 1908년 철거됐으나 당시 군수의 꿈에 관우가 나타났다고 해서 다시 복원됐다. 사당 별채 건물에는 하루 천리를 달렸다는 관우의 적토마 그림도 함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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