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事 현장 꼭 그가 있었다, 충주 김예몽

2011.01.02 21:11:30

조혁연 대기자

나라의 말과 글이 달라지면서 통역과 번역은 늘 필요했다. 조선시대 때도 이를 관장하기 위한 기구로 사역원(司譯院)이 존재했다. 사역원은 일반 생도 외에 강이관(講肄官)과 강예관(講隷官) 등으로 학생을 구성했다.

강이관은 관직이 있으면서 한달에 15일 정도, 강예관은 관리가 됐으면서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기본틀은 사대교린이었다.

사역원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꾸준히 인재를 배출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규율이 엄격했다. 사헌부는 학생들의 성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곤장을 상소하기도 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사직 이계화·김예몽·예조좌랑 박적선·승문원박사 장계숙·돈녕부부승 홍일동·사정 윤자운이 강례관으로써 여러 해 동안 중국말을 강습했으나, 고의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므로 조금도 실효가 없사오니, 죄가 장(杖) 80대에 해당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거명된 인물 중에 김예몽(金禮蒙·1406~1469)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성품이 온화 청렴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한시에도 능했다는 사평을 받은 인물이다.

김예몽의 이름이 의방유취(醫方類聚)와 관련된 기록물에도 보인다. 의방유취는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편찬된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으로 모두 265권으로 구성돼 있다.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 모두 약탈돼 현재는 일본 국내성도서료에 보관돼 있다.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저작랑 유성원·사직 민보화 등에게 명하여 여러 방서(方書)를 수집해서 분문류취(分門類聚)하여 합해 한 책을 만들게 하고, (…) 안평 대군 이용 등으로 하여금 감수(監修)하게 하여 3년을 거쳐 완성하였으니, 무릇 3백 65권이었다. 이름을 의방유취(醫方類聚)라고 하사하였다.'-<세종실록>

김예몽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실록을 보면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등 모두 다섯 임금을 모셨다. 특히 그는 조선전기의 주요 국가대사 현장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격무에 시달렸던 문종이 젊은 나이에 드러눕고 말았다.

'임금(문종 지칭)의 병환이 위급하니, 직집현 김예몽 등이 내의(內醫)와 더불어 사정전의 남랑에서 방서(方書)를 상고하고, 수양 대군 이하의 여러 종친이 모두 있었다.'-<세종실록>

본문 중 '방서'는 의약에 관한 책을 지칭하고 있다. 문종 승하후 얼마 안있어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단종 옹위세력을 제거하는 계유정란을 일을켰다.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 단종이 왕위를 양보했다. 그 현장에도 김예몽이 있었다.

'의정부에서 집현전 부제학 김예몽 등으로 하여금 선위·즉위의 교서를 짓도록 하고 유사가 의위를 갖추어 헌가를 근정전 뜰에 설치하였다. 세조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선위를 받으니, 그 선위 교서에 이르기를…'-<세조실록>

김예몽은 우리고장 충주에서 나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걸신(乞身) 하고, 충주에 돌아가 있다가 졸하니, 사림들이 애도하였다.'-<예종실록>

본문 중 '걸신'은 지금으로 치면 명퇴 신청으로, 사직을 자청하는 것을 말한다. 충주시 가금면 잠병리 막고개에 그의 묘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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