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체'를 남기다, 충주사림 김구

2011.01.11 19:03:29

조혁연 대기자

계량화된 수치만으로 어떤 학생의 미래성장 가능성이나 특기를 충분히 검증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도 이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했다.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으나 객관성은 자주 문제됐다.

사학자들이 중종대 현량과 급제자 28명을 출신지별로 분석한 결과, 전체 급제자 28명 중 한양 10명, 충청도 8명, 경기도 2명, 경상도 5명, 전라도 1명, 강원도 1명, 미상 1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충청도 8명을 다시 분석한 결과, 충주·음성 출신이 5명으로 조사됐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서인의 뿌리인 기호사림이 서서히 세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사가들은 충주·음성을 기호사림과 분리해 '충주사림'이라고 별도로 칭하기도 한다.

충주·음성 출신 급제자 중에는 김구(金絿·1488∼1534년)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30대 초반에 홍문관 부제학이 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됐다. 여기에는 먼저 정계에 진출한 김정, 김식 등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사가들은 보고 있다. 김정은 우리고장 보은, 김식은 제천출신 인물로, '범기호사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김구는 글씨를 잘 써 한석봉, 안평대군, 양사언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명 명필가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김구 서체는 매우 독특하여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불렸다. 중국 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

'공은 필력이 경건하여 종요(鍾繇)ㆍ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본받았다. 일찍이 중국 사람이 공의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드디어 쓰지 않았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드물다.'-<기묘록보유>

인용문 중 종요(151~230)는 중국 위나라 사람으로, 조조를 섬겼다. 기묘록보유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의 사적을 엮은 책으로, 안로가 편찬했다.

중종 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훈구파에게 있어 현량과에 관련된 인물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사림파가 유능한 인재 선발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자파 인물만 천거했다고 생각했다. 훈구파는 그중에도 조광조 등 사림파 핵심 몇명은 반드시 손봐야 한다고 상소했고, 중종은 그것을 수용했다.

'전교하였다. "접때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서로 붕비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중종실록>

결국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구는 개령·남해·임피 등으로 13년 동안 유배지를 전전하다 풀려났으나 곧 병사했다. 김구는 충남 예산이 고향이다. 그러나 그의 증조부 김예몽의 묘는 전회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고장 충주시 가금면 잠병리 막고개에 위치한다.

따라서 김구도 유년시절을 충주에서 보낸 것이 확실해 보인다. 사가들은 그를 '충주사림'의 한 명으로 분류하고 있다.

※ 10일자 본란 내용중 '이산해가 그의 작은 아버지다'는 '이산해가 그의 친조카이다' 이기에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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