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열부를 대거 발굴하다, 충청감사 유여림

2011.01.18 20:08:19

조혁연 대기자

조선 중종 때의 인물로 유여림(兪汝霖·1476∼1538)이 있다. 그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감사)로 임명됐다. 조선시대 때는 외직, 즉 관찰사로 나갈 때는 임금 앞에서 배사(拜辭)라는 의식을 가졌다.

이는 임지로 가기 전에 임금에게 공손히 절하고 하직 인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당시 충청도에서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일이 더러 발생했던 모양이다. 중종이 배사를 위해 궁궐에 들어온 유여림에게 이를 바로 잡으라는 하명을 한다.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현부(賢否)는 감사가 출척(黜陟)을 엄명하게 하는 데 달렸으니, 경은 가서 힘쓰라. 그리고 충청도는 근래 풍속이 투박해졌으니 경은 풍속 혁신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라"-<중종실록>

본문 중 출척은 무능한 관리를 물리치고 유능한 관리를 품계를 올려주는 행동을 일컫는다. 유여림이 부임 1년만에 '실적 보고'를 하게 된다. 관내 효자와 열부를 찾아내 임금께 보고하는 글인 장계(狀啓)를 올렸다.

'충청도 관찰사 유여림이 장계하기를, "충주(忠州) 사는 전 혜민서 참봉 하숙륜은 어머니가 악질(惡疾)에 걸리자 다리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불에 태워 약에 타서 드리니 그 병이 쾌차하였고, 지성으로 봉양하였습니다.'-<중종실록>

'옥천사는 순양역(順陽驛)의 역리 양녹의 아내 막장(莫莊)은 그 남편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복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제사드리고 있습니다.'-<중종실록>

'같은 고을에 사는 유학 임세화는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막을 떠나지 않았고 처자도 돌보지 않으면서 3년간 죽만 먹었습니다. 덕산(德山) 사는 양녀 보덕(寶德)은 그 남편이 기묘년에 죽었는데 사당을 짓고 신주를 모시면서 지금까지 상복을 입고 있습니다.'-<중종실록>

열거한 내용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조선시대식의 효실천 방법이다. 인용글에는 공부할 내용이 더러 있다. 여성 이름으로 '막장'(莫莊)과 '보덕'(寶德)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름이다. 성도 존재하지 않고 이름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두식 이름같지도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이름 대부분이 이와 같은 형식을 띄고 있다.

가령 수양대군에 의해 노예로 쫓겨난 성삼문 어머니 이름은 '미치'(未齒), 아내는 '차산'(次山), 김문기 아내는 '봉비'(奉非), 딸은 '종산'(終山)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당시 순우리말로 된 여성의 이름을 실록에 한문으로 옮겨적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음가(音價)만 쫓다보니 그 뜻은 무시됐다. 가령 '구슬'이라는 이름은 '仇瑟伊', '방울'은 '方兀', '개똥이'는 '개질동'(介叱同), '가시레'는 '加屎同'으로 적는 식이다. 유여림은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 외에 단양현감도 역임했다. 살펴보니 제 8대가 된다. 그는 사관으로부터 성격이 올곧았다는 평을 받았다.

'예조 판서 유여림(兪汝霖)이 졸(卒)하니 시호를 경안(景安)이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여림은 도량이 넓고 일에 임하여 관대하고 여유가 있으며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유속(流俗)에 쉽게 따르지 않았다.'-중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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