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유배생활을 즐기다, 보은현감 최산두

2011.01.20 22:15:34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선비들도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전원을 찾아 유유자적하는 삶이었다. 이른바 은거(隱居)다. 이것 외에 의식적으로 한직(閑職)을 맡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됐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그의 인생 말년에 명목상 직책만 맡은 채 시, 술, 거문고 등을 벗삼아 즐겼다. 그는 이같은 생활 방식을 시로 남겼다. 그의 시 '중은'(中隱)이다.

'大隱은 조정과 저잣거리에 숨고(大隱住朝市) / 小隱은 산속에 들어가는 것이라네(小隱入丘樊) / 산속은 너무 쓸쓸하고(丘樊太冷落) / 조정과 저잣거리는 너무 시끄럽다네(朝市太·喧) / 차라리 대은과 소은의 중간에 은거하여(不如作中隱) / 관직에 은거하는 것이 적당하다(隱在留司官)….'

그가 왜 시제목을 '중은', 즉 '중간 정도에 숨는다'로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산속같이 너무 적막한 곳은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 중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그대가 질펀하게 놀기를 좋아한다면(君若愛游蕩) / 성 동쪽에 봄 동산이 있다네(城東有春園) / 그대가 한번 취하기를 바란다면(君若欲一醉) / 항상 손님으로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네(時出赴賓筵) / 낙양에는 군자가 많으니(洛中多君子) / 마음대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네(可以恣歡言).

인용문 '洛中多君子' 중 낙중은 낙양의 가운데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중에 이 표현을 차용한 인물군이 있었다. 조광조·김정·김식, 김안국, 최산두가 그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 성향과 시국관이 거의 같았다.

그런데 왠지 조광조와 함께 어울렸다는 것이 불안하다. 기묘사화가 발생했고 그리고 채 한 달이 안 돼 유배중인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렸다. 그리고 같은 날 한 선비는 동복현(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으로 유배됐다. 그가 바로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이다.

그는 출신이 미천했다. 조선시대 생원·진사 합격자와 그 가계도를 기록한 것으로 사마방목이 있다. 이 사마방목에는 그의 부친만 기술돼 있다. 그는 문장 실력이 대단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보인다.

'사신은 논한다. (…) 최산두(山斗)는 비록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나 사람됨이 학문도 있고 덕행(德行)도 있으니, 어진이를 조정에 등용함에는 일정한 한계가 없는 것인데 안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유배를 당했으나 오히려 이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유배지에서 친구 윤구(尹衢)에게 다음의 시를 보냈다.

'강길에 봄을 찾기가 늦었는데(江路尋春晩) / 그대를 생각하여 달 아래 거니네(思君步月時) / 해마다 산 시냇물 굽이에서(年年山澗曲) / 분수 따라 살아간다네(隨分有生涯)'-<해동잡록>

최산두는 우리고장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 보은현감을 지냈다. 그가 어떻게 보은현감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앞서 언급한 낙중군자의 한 멤버인 김정이 보은 인물인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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