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忠公道로 그 이름이 바뀌다

2011.01.23 19:19:41

조혁연 대기자

동서를 막론하고 궁녀에 대한 소유권은 왕에게 있었다. 이런 구도 안에 또 다른 남성이 존재하면 이성적으로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거세남 환관(일면 내시)의 기원은 이같은 궁궐내 환경과 관련이 있다.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환관 역사도 비교적 오래 됐다. 통일신라의 흥덕왕은 즉위년(826)에 왕비 장화부인을 잃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에 젖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 금새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리지 환수(宦竪) 뿐이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환수'가 바로 환관을 지칭한다. 조선 전기의 최고 환관으로는 단연 김처선(金處善·?~1505)이라는 인물이 꼽힌다. 그는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여러 임님을 모셨다.

연산군도 처음에는 그에게 말(馬)을 하사하는 등 비교적 곰살맞게 대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 것을 알고는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같은 심리 상태는 폭정을 뛰어넘어 광기로 이어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리학적 소양이 있었던 환관 김처선이 주군 연산군에게 대놓고 직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직언이 의도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취중에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반면 실록은 김처선이 취중에 직언을 한 것으로 적고 있다. '전교하기를, "내관 김처선이 술에 몹시 취해서 임금을 꾸짖었으니,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그 집을 못 파고 그 본관인 전의(全義)를 혁파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의 광기가 폭발했다. 그는 활을 들어 김처선을 쐈고, 그래도 그가 직언을 계속하자 칼까지 뽑아들어 내리쳤다.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연려실기술>

김처선의 참혹함은 죽은 후에도 계속됐다. 그의 시체가 범에게 던져졌고 또 이름에 있는 '처(處)' 자를 조정은 물론 민간에서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교하기를, "처(處) 자는 곧 죄인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 자를 쓰지 말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의 광기는 통치로도 이어졌다. 김처선은 충남 전의가 본관이다. 당시 전의는 청주목에 속했다. 그의 입양아들 이공신(李公信·?∼1505) 역시 청주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이른바 거향(居鄕)이다. 이 사건으로 '충청도' 이름은 청주가 빠지고 공주가 들어오면서 '충공도'(忠公道)가 됐고, 청주목은 혁파돼 한동안 행정 지위에서 사라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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