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여년만에 한을 풀다, 청주 박광우

2011.01.27 20:13:01

조혁연 대기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 생원이 기개높게 상소하는 장면이 기묘록보유에 등장한다.

'참판 이찬(李澯), 참지(參知) 김노(金魯)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쓰므로 두 사람에게 붓을 들고 종이를 앞에 놓게 하더니, 공이 줄줄 불러대는데 글이 샘솟듯 하여 김(金)과 이(李)가 미처 받아쓰지를 못 하였다. 단번에 10여 편을 썼는데 사연이 매우 간절하였다.'-<기묘록보유>

본문에 등장하는 '공'은 박광우(朴光佑·1495∼1545)라는 인물이다. 생원은 지금으로 치면 초급 과거에 합격한 신분 상태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주어줬다. 곧바로 하급관리로 나가거나 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시험보다 더 높은 것이 바로 문과시험으로, 지금의 고시(高試)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국조방목(國朝榜目)이라는 것이 있다. 박광우 이름이 이 기록에 등장한다. 따라서 서두의 박광우 상소는 정식관리 신분이 아닌, 유생 상태에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과급제 후의 박광우는 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는 한때 강릉부사 직도 수행했다. 이때 고찰 월정사도 들렸던 모양이다. '월정사' 제목의 한시가 전해진다.

'솔 그늘 우거진 속 길 한 가닥 뚫렸는데( 松·陰森一逕通) / 문앞을 당도하자 홍살문이 보이누나(入門初見殿扉紅) / 일천 층 보탑에는 나는 새가 맴돌고(千層寶塔回飛鳥) / 팔각의 방을 소리 반공에 메아리치네(八角神鈴響半空) /…/종 울리자 갑자기 문수회가 시작되니(鍾鳴忽作文殊會) / 옥좌의 향 연기에 만 골짝의 바람일레(玉座香烟萬壑風)'-<성호사설>

고요한 산사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박광우는 그러나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를 비켜가지 못했다. 그는 일찍이 조광조와 교분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당대의 명유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화를 당했다. 그는 선동역이라는 곳으로 유배됐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박광우는 우리고장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2백여년 후 지역 상주박씨 후손들이 억울함을 풀어주고 또 시호를 내려줄 것을 지속적으로 상소한다.

'또 아뢰기를,"청주의 유학 박이중(朴履中)이 상언에서, '저의 9대조 증 이조 판서 박광우(朴光佑)를 위해 시호를 주청하는 문제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일성록>

영조 때 시작된 상소가 정조 대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됐다. 정조는 박광우에게 절개가 곧았다는 뜻에서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가 유배지에서 죽은지 2백여년만이다.

'증 이조 판서 박광우에게는 정절(貞節), 증 병조 판서 김덕령에게는 충장(忠壯), 월성군 김원량에게는 강민, 증 이조 판서 김저에게는 충민이란 시호를 주었다.'-<정조실록>

박광우이 묘가 우리고장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73-1에 위치한다. 묘소 중앙에 봉분이 있고 바로 앞에는 위패비(位牌碑)가 놓여 있다. 또 왼쪽에는 숙종 13년(1687) 송시열이 글을 지어서 세운 묘표(墓表)도 존재한다.

주위에는 조선시대 무덤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인석 등도 세워져 있다. 충북도기념물 제 7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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