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다시 '유신현'으로 강등되다

2011.02.06 17:51:47

조혁연 대기자

전회에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패륜사건으로 '충주목'이 '예성부'로 읍호가 강등됐고, 그에 따른 여파로 '충청도'도 '청공도'(淸公道)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가 1540년(중종 35)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충주가 이번에는 다시 유신현(維新縣)으로 읍호가 강등된다.

'충청도를 고쳐 청홍도로 만들고, 충주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명종실록>

청홍도할 때의 '홍'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왔다. 1547년(명종 2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 벽위에 붙여진 벽서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 내용은 상부에 보고 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의 일파를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송인수·이약빙·임형수 등도 윤임의 일파로 지목돼 함께 사사했다.

거론된 인물중 이약빙은 우리고장 충주출신이고, 그에게는 홍남, 홍윤 두 아들 형제가 있었다. 그중 홍남은 벽서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누명을 받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그런데 당시 두 형제는 전답과 노비 상속 문제로 척지는 관계가 되면서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 홍남이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날 의도로 동생 홍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이때 사람 이름이 적힌 명단이 군사 봉기의 증거물로 관에 제출됐다.

추국(推鞫)이 시작됐다. 추국은 의금부(義禁府)가 왕명에 따라 변란, 역모 등의 혐의가 있는 중죄인을 직접 신문하는 것을 말다. 명종실록에는 이홍윤을 국문하는 장면이 무려 70여회나 등장한다.

'추관 등이 아뢰기를, "이홍윤을 힐문하였으나 전번 공초와 별로 가감이 없으니, 형신을 가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입니다. 큰 죄인이 죽는다면 정형(正刑)을 집행할 수 없게 되므로…"'-<명종실록>

실록은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결국 홍윤을 비롯해 명단에 올라있던 당시 충주지역 선비 40~50명이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그리고 연좌제에 따라 충주목은 유신현으로, 충청도는 청홍도로 읍호가 강등되거나 변경됐다.

한 지역에서, 그것도 당대 지식인 40~50명이 한꺼번에 처형당한 것은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사관도 이를 의식, '충주 전체가 온통 비었다'라고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비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홍남이 꾸며낸 일이었다. 그런데 이홍남이 자손을 둔 것이 어찌 천도(天道)이겠는가.'-<명종실록>

사관이 '꾸며낸 일'이라고 단언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증거로 제출된 역모사건 명단은 사실은 군사봉기 명단이 아닌, 홍윤의 계원(契員) 명단이었다. 충주는 그로부터 18년 후 다시 목으로 복호됐다. 그러나 이때 입은 인적 손실은 충주지역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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