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이홍윤 사건의 감회를 적다, 민기

2011.02.08 20:19:54

조혁연 대기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퇴위한 후 가진 직업은 문사관이었다. 문사관(問事官)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죄인의 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검찰청의 서기와 비슷하다.

전회에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읍호 강등되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충청도가 청홍도(淸洪道)로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연좌제는 가족에게 보다 혹독하게 적용됐다.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명종실록>

본문중 대명률은 명나라 형법을 일컫는다. 이홍윤을 심문할 때 문사관으로 배석한 관원이 민기(閔箕·1504∼1568)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옥사가 끝나자 통정 대부로 승진하여 부제학에 제수되었다.'-<잠곡유고>

잠곡유고(潛谷遺稿)는 후대 개혁 정치가인 김육(金堉·1580~1658)이 지은 저서로 지난 90년대 한글로 번역된 바 있다. 김육은 우리고장과도 어느정도 인연이 있어, 그의 고조가 기묘명현의 한 명인 김식(金湜)이다. 김육은 제천 인물이다.

잠곡유고의 서두는 민기에 대해 사실만을 적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그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그를 혹평했다.

'우의정 민기(閔箕)가 죽었다. 민기는 비록 당시의 공론(公論)이 그를 칭허(稱許)하였으나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며, 볼 만한 행위는 없었다. 정승 자리에 오르자 외면으로는 올바른 사람들을 도우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사실 남의 눈치만 보았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칭찬하였다.'-<석담일기>

그러나 이것과 관련없이 민기 자신은 이홍윤 역모사건 때 문사관을 맡을 사실에 대해 속으로 자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사건이 조작에 의한 무고였음을 민기 자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같은 잠곡유고 후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충주(忠州)의 옥사(獄事)에 있어 공은 마음 속으로 원통함에 대해 상심하고 있었으며, 또 그로 인해 승진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석담유고>

인용문 중 충주옥사는 이홍윤 역모사건, 공은 민기를 일컫고 있다. 민기는 이 사건 후 청홍도 관찰사(1561)으로 부임하기도 한다. 그의 신도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나라의 입장에선 불행한 거고(邦家不幸) / 백성들도 복 없기는 마찬가지네(民亦無祿) / 만고토록 한스러움 남아 있기에(萬古遺恨) / 이 빗돌에 새기어서 남겨 두누나(留之玆石)

신도비는 종2품 이상 벼슬자의 생전 행적을 새긴 비를 말한다. 문장 끝부분이 알 듯 모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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