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 난을 진압하다, 증평 신경행

2011.02.17 19:45:12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이는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서자가 돼야 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을 통해 세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자식도 천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반대인 종부법(從父法)도 한시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어머니가 첩이라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보면 좋은 의미로 보일수 있으나, 이 경우 양인이 된 첩의 자식은 부역을 의무적으로 져야했다. 왕족출신 서자인 이몽학(李夢鶴·?∼1596)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사료에는 잘 기술돼 있지 않다. 그는 1596년(선조 29)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함락하고, 이어 청양 등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성문을 닫은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이때 사태를 반전시킨 벼슬아치가 신경행(辛景行·1547∼1623)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찮게 난을 진압하는데 일정부분 공을 세우게 된다.

'목사 홍가신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찌 할 방책이 없어 성문만 닫고 있을 뿐이었다.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으로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연려실기술>

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몽학은 자기부하 임억명(林億明)에게 생포됐고, 그의 베어진 머리는 관군에게 넘겨졌다. 이후 세 사람의 운명이 더욱 극명하게 엇갈리게 된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몽학의 머리와 수족을 이미 올려왔으니, 법대로 철물전(鐵物廛) 앞길에서 효수했다가 3일이 지난 다음에 사방에 돌려 보일 것을 감히 품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했다.'-<선조실록>

"상께서 '임억명은 (맨 먼저 역적 괴수 이몽학을 죽인 사람이다) 이미 천인을 면하여 서리(書吏)에 들어가 소속되었으니 이는 곧 평인(平人)인 셈이다'고 전교하셨습니다."-<선조실록>

'신경행(辛景行)과 임득의를 3등에 봉하고 (…)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선조실록>

신경행은 난을 진압한 요행은 있었으나 행정은 잘 펼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에 조정의 지적을 자주 받았다.

'정언 한찬남이 아뢰기를, "충청병사 신경행(辛景行)은 사람됨이 우활하여 병사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도내의 비웃음을 샀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광해군일기>

인용문중 병사는 병마절도사를, 체차는 지금'식으로 표현하면 '임기중 교체'가 된다. 신경행은 우리고장 증평 인물이다. 그의 묘가 증평읍 남차리 산3-1에 위치한다. 도기념물 제 132호로, 망부석·문관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그가 받은 공신녹권, 영정 등도 지난 2003년 도유형문화재 제 155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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