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 영결문을 남기다, 음성 김저

2011.02.20 16:16:34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에 충주 팔봉서원과 음성 지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김세필(金世弼·1473∼1533)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의 그는 두번의 사화(史禍)를 겪었다.

그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 묘의 이장 문제로 연산군에게 밉보이면서 거제도로 유배됐다. 1차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종종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났다.

그는 기묘사화 때 또 한번의 고초를 당했다. 왕도정치를 지지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하다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그는 중도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어떤 사학자는 이때를 충주사림의 절정기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연경, 이자, 노수신 등이 이 언저리에 등장한다.

그 평화는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늦게 얻은 자식으로 김저(1512∼1547·3남)가 있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으로 있으면서 "소윤이 너무 많은 사림을 도륙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것이 빌미가 돼 그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이때 모친이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모친과 이별하는 장면이 옛문헌에 실려있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 만남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귀양을 떠날 때에 어머니 이(李)씨가 동문(東門) 밖까지 나와서 끌어안고 통곡했는데 공이 하직하고 말에 오른 뒤에도 어머니는 울부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거의 종일토록 길을 떠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옷자락을 뿌리치고 통곡을 하면서 갔으니, 옛사람이 옷자락을 끊어 버렸던 일과 같았다.'-<연려실기술>

김저는 장가든지 20년이 넘었지만 자식을 갖지 못했다. 그것에 대한 심정을 둘째 형 '구'에게 영결하는 글로 보낸다. 영결문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문장을 말한다.

'그의 둘째 형인 구 참봉 에게 영결하는 글을 지어서 보냈는데, "병오년 8월 10일 아우는 형님과 멀리 하직합니다. 서쪽과 남쪽은 천리 길이어서 양쪽이 모두 연락할 길 없으니, 죽으나 사나 뒷일을 부탁해야 되겠습니다."'-<연려실기술>

인용문 중 '죽으나 사나 뒷일'은 역시 자식을 두지 못한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는 "형님은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쓸 만하온 바, 둘째가 벌써 자랐기로 속으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둘째 조카를 양자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내비춘다. 그의 영결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내가 죽을지 살지 또는 오래 갈지 곧 오게 될지 모르오니 이 글을 두고 나 본 듯이 여기소서. 갈 길이 바빠 여러 말 할 수 없고, 글도 제대로 되지 아니하여 몽당붓끝 가는 대로 써 올립니다. 떠나는 아우 저'-<연려실기술>

그는 유배지에서 이듬해 사사됐다. 그의 위패가 음성 지천서원에 모셔져 있고,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부인 고령신씨와 합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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