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으려 하다, 태종

2011.11.08 16:17:01

조혁연 대기자

조선초기 경상도 세곡(稅穀)은 마산창 등 남해안 3창에 모아져 서해를 거쳐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그러나 바닷길로 운송하다 보니 사나운 바람을 만나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태종 3년(1403)의 침몰 사고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무려 34척의 배가 동시에 침몰했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해중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태종실록>

실록은 이날 침몰 사고의 재산손실과 인명희생 규모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태종은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을 바닷길이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태종은 생각이 대범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세곡을 운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구상을 한 바 있다. 결국 환경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이었다.

'우대언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세곡을) 육로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태종실록>

태종은 양민이 아닌, 군사들을 공사현장에 동원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고 그 적정 규모를 5만명 정도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전의 조선 군인의 수가 대략 14만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5만명은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도·강원도·전라도 군사가 4만 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운하를 파는 일이 거창한데, 군인의 수가 적다" 하였다. 정부에서 다시 아뢰었다. "5만 인으로 하고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가하다" 하였다.'-<태종실록>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겠다는 구상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태종이 백두대간 양사면의 지방 행정관인 충청도관찰사와 안동대도호 부사를 불러 구체적인 착수 시기를 물었다. 이에 두 사람은 "아이디어는 좋지만 군사동원 시기는 다소 조정해 달라"는 식으로 답했다.

"지금 운하를 파는 군인을 조발하자면 수를 채우기가 어려우니, 비록 이 호수라도 인정(人丁)이 많이 있으면, 아울러 초집(抄集)하여 가을을 기다려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태종실록>

의견이 다소 분분하자 성석린·조영무 등이 "운하를 파는 것은 폐지할 수가 없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농한기이니, 무엇이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라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운하사업은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백두대간 운하사업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대신 경상도 세곡을 계립령이 아닌 조령을 통해 충주 남한강 수계로 옮기도록 했다. 조령 코스가 직선로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백두대간 운하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영역 밖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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