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에 졸기가 두번 실리다, 영동현감 권민수

2011.12.01 17:23:59

조혁연 대기자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權敏手)가 도내(道內)에 장문(場門)을 설치하겠다고 청하므로 호조(戶曹)에 의계(議啓)하도록 했더니, 또 각도에도 아울러 설치하자고 청했다."-<중종실록>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권민수(權敏手·1466∼1517)라는 인물이 건의, 우리고장에도 장시(場市·5일장)가 처음 들어서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영외(嶺外)로 유배됐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군정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는 등 강단있는 관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사관으로부터 악평을 받은 인물로 유명했다. 심지어 당시 사관은 '술주정하다 죽었다'라고 졸기를 쓰기까지 했다.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가 졸하였다. 권민수는 심술이 심벽하고 불측하여 겉으로는 화평하나 속으로는 시기를 부려, 선류(善類)에 대해서도 속으로 시기하고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젊어서부터 글한다는 명성을 도둑질하여 명류에 끼었었고 또한 성격이 사나와 기세를 잘 부렸으며, 벼슬과 세력이 점점 높아지매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주정하다가 죽었다.'-<중종실록>

사관(史官)이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글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대개의 사관은 극주관적으로 인물평을 할 경우 '사신은 논한다'(史臣曰) 투로 서두를 시작, 주관적인 글임을 미리 알리는 것이 보통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의 졸기에 관한 기사가 실록에 두번 등장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글은 '중종 11년(1516) 12월 18일 4번째 기사'이다. 그러나 '중종 12년(1517) 1월 22일 4번째 기사'에도 그의 졸기 기사가 또 다시 등장한다. 내용은 전보다는 다소 부드러워졌으나 악평 기조는 여전하다.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가 졸하였다.사신은 논한다. 권민수는 젊었을 때에 벗을 만나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마음 속이 은밀하여 헤아릴 수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헌장이 되자 이행(李荇)과 뜻이 맞아 박상·김정의 봉사가 그르다고 논하여 찬출되게 함으로써 전자의 의아가 과연 맞아들어갔다.'-<중종실록>

특히 '거개 명성은 사람을 속일 만하고 권세는 사람을 움직일 만하여 바로 한 세상의 향원(鄕愿)이니, 그가 일찍 죽음은 실로 선량한 사류들의 다행이다'라고 서술, 죽음 자체를 반기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 기록상 유일무일한 일이 왜 벌어졌는지는 추정이 쉽지 않다. 다만 사관이 기록한 문장의 양이 다소 차이가 난다. 전자는 기사가 두어 줄에 불과하나 후자의 사신(史臣) 논평은 10여 줄이나 된다.(한문 기준)

그는 관료생활 초기 우리고장 영동현감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음은 신용개 등이 지은 속동문선에 실려있는 '영동현중'(永同縣中)이라는 한시다. 비오는 영동팔경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고 있다.

'비 내리려다 말고 강안개만 젖었는데(欲雨未雨江霧濕) / 반쯤 피다만 들꽃은 차가워라(半開未開野花寒) / 봄 성 2월에 석잔 술로써(春城二月三杯酒) / 남으로 온 여러 일을 판정하여 한가하도다(判得南來萬事閑)'-<속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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