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중 괴산에 집을 짓다, 이문건

2011.12.06 16:06:37

조혁연 대기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조선 성종과 명종 사이를 산 인물로 호는 묵재, 본관은 경상도 성주다. 그는 그의 호를 딴 '묵재일기'를 32년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양반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3종류의 개인일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일기의 행간을 하나하나 살피면 당시 양반들의 사유체계와 부축척 방식, 그리고 가정사의 시시콜콜한 사연을 손금보 듯 알 수 있다.

그는 73살 생애에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그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조광조 제자였다. 1519년 그 유명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때 다른 제자들의 외면과 달리 이문건 형제는 조광조를 문상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2년 후 훈구파에 의해 형 충건은 유배당한 후 사사됐고, 이문건은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문건에게는 조카 이휘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래가 촉명했던 그는 택현설, 즉 "어진 임금을 선택해서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문건도 택현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지금의 성주로 '본향안치'를 당해야 했다.

본향안치는 유배형 중 가장 약한 형으로, 고향에서 생활하되 거주지만을 제한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23년간 유배생활을 한 끝에 성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문건은 우리고장 괴산과 인연을 많이 맺고 있는 인물이다. 두번째 유배부터 그 관련성이 나타난다. 이 부분의 묵재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546년 9월 10일: 조카 이휘가 택현설 주모자로 몰려 능지처참되다. 9월 12일: 청파에 사는 큰누이집으로 가서 처분을 기다리던 중 본향안치형을 받다.

9월 16일: 새벽에 의금부 서리 최세홍이 와서 경상도 성주로 배소로 정해졌다고 알리다. 이에 술을 대접하고 갓모자 등을 선물로 주다. 9월 17일: 한양을 출발하여 11일만에 성주에 도착했는데, 그 중간에 처가가 있는 괴산에 이틀간 머물다.

이문건은 이틀간 괴산 처가에 머물면서 처조카 형제들에게 능지처참당한 이휘의 시신을 잘 수습할 것 등을 당부한다. 성주에서 유배생활에 들어간 이문건은 몇 년 후면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이문건은 사면령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면 기대감에 밤을 세우기도 한다. 이런 기대감은 유배가 풀린 후의 인생 설계의 하나로, 처가가 있는 괴산에 집을 새롭게 짓는 쪽으로 발전한다.

당시 괴산에는 부인이 한양에서 친정으로 내려와 있었고, 나머지 잡일은 유배지 성주에서 노비를 통해 이른바 '원격조정', 즉 리모트 컨트롤을 하게 된다.이 부분의 묵재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551년 7월 15일자: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목재를 계곡 근처로 끌어다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없어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듬해 4월 25일자: 오늘 괴산에서 기둥을 세운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일이 좋지 않겠다.

그해 8월 12일자에 '집을 덮는 철장물을 가져갔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 이 직후 괴산집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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