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주자 영정을 갔고 왔을까, 음성과 김영지

2012.01.17 16:51:23

조혁연 대기자

조선은 '대국을 섬긴다', 즉 사대(事大)를 외교의 한 방도로 삼았기 때문에 매년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하정사(賀正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등이 바로 그것으로, 이른바 삼절사라고 불렀다.

하정사는 새해 정월, 동지사는 세밑 동지 무렵, 성절사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에 맞춰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이중 하정사는 매년 10월말이나 12월초에 떠나서 그 해가 가기 전에 북경에 도착, 40∼60일 동안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 중국 황제에게는 모시·명주·백면지(白綿紙)를, 황후에게는 나전소함(螺鈿梳函) 등을 바쳤다. 백면지는 고급 종이의 일종, 나전소함은 자개로 만든 화장 도구함을 일컫고 있다.

힘없는 나라 조선의 사신은 황태후와 황태자에게도 선물을 바쳐야 했다. 그 종류는 황제와 비슷하나 그 수량은 대략 절반 정도였다. 그해 하정사는 2월중에 떠나서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세종 즉위년(1418)의 하정사로 김여지(金汝知·1370∼1425)라는 인물이 선발됐다. 세종이 김여지에게 중국 황제의 신년맞음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휴대하게 했다. 이렇게 정초에 중국에 올리는 외교글을 '정조하표전'(正朝賀表箋)이라고 불렀다.

표전문은 일반글과 달리 외교적인 수사로 쓰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치더라도 조선시대 최고 명군인 세종이 올리는 글에서도 한 국가의 주체성을 찾기는 힘들었다.

'봉력(鳳曆)이 해를 매기매, 삼양교태(三陽交泰)의 기운을 열고 용정(龍庭)에 상서가 모여 만국이 와서 함께 조회함을 받으시니, 무릇 해·달이 비치는 곳엔 다 고루 춤추며 뛰노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황상폐하는 총명예지(聰明睿知)하시며, 강건수정(剛健粹精)하시와…'-<세종실록>

우리고장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 7호인 태교사(泰喬祠)라는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제법 큰 사당으로 홍살문, 재실, 솟을삼문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에 강당, 뒤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는 등 이른바 전당후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여느 사당과 달리 이 사당은 주희(朱熹·1130 ~ 1200) 한 명만을 모시고 있다. 따라서 주희의 생일인 음력 9월 15일에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와 관련 일부 자료는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에 주응동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여지가 명에서 가져온 주희(주자)의 영정을 경기도 안성에 사는 김용으로부터 기증받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곡영당(文谷影堂)이 그 시초'라고 밝히고 있다.

또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었는데, 이때 사당의 명칭을 태교사로 고쳐 불렀다'라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김여지가 주희 영정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세종실록 즉위1년 2월 16일자 기사는 '하정사 김여지가 북경에서 돌아왔다'(賀正使金汝知回自京師)라고 매우 간략히 적혀 있다.

세종실록 김여지 졸기에도 '무술년에 하정사(賀正使)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다음 해에 돌아와 병으로 사직하였다'(즉위 7년 1월 1일자)라고만 돼 있다. 사실 여부는 떠나 김여지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우리고장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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