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식 뇌물을 통박하다, 음성 채수

2012.02.07 17:14:13

조혁연 대기자

인류 뇌물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 무렵의 이집트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도 뇌물이 골칫거리였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이라고 규정, 이를 단속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수령이나 무관에 임명된 벼슬아치는 인사가 날 경우 해상 부서인 이조나 병조에 가서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당참례(堂參禮)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규정으로 불법은 아니었다. 조선전기에 이미 그 내용이 보인다.

'새로 임명된 호군(護軍)은 사은숙배하고 의정부에 당참례를 행한 뒤 본방에 참알·회좌(回坐)를 행하기 전에는 (…) 각처에만 명함을 들이고, 타처에는 출입할 수 없다.'-<태종실록>

문제는 당참례가 아닌, 이때 은밀히 오가는 굼품인 당참채(堂參債)에 있었다. 지방관에 임명된 수령이나 무관이 인사부서인 이조나 병조를 방문했을 때 그곳 하급관리들이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

이때 자문(尺文)이라는 영수증까지 발부됐다. 어떤 거래가 있을 경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교부됐던 자문은 길이가 한 자 가량되는 짧은 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지방관들이 부임지 고을에서 당참채의 재원을 마련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일부 지방관들은 상납가의 수십 배를 당참채의 명목으로 거두어 중간에서 착복하는 등 관리들도 이를 지능적으로 악용했다.

당참채는 다른 부서에서도 영향을 끼쳐 상서원 하급관리는 어새를 찍어주는 대가로 '안보채'(安寶債), 승정원 등에서는 예물 옷감의 일종인 '신제수예목'(新除授禮木)이라는 뇌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이같은 부작용에 대해 최초로 상소를 올린 인물이 채수(蔡壽·1449∼1515)였다.

"이조나 의정부에서 새로 제수된 수령들이 당참을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폐백을 드린 연후에야 참알을 허락합니다. 수령이 집에서 마련할 수가 없으면, 경저인으로 하여금 빌리게 하여 바친다고 합니다. 이는 전조(銓曹)가 사람에게 벼슬을 시키고서 값을 요구하는 것이니 청컨대 엄하게 금하도록 하소서."-<성종실록>

폐백은 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를 뵐 때 올리는 대추 등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폐백의 본래 '일반적인 모든 예물'을 의미했다. 채수는 폐백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가면 뇌물 근절을 강력히 건의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경저인'(京邸人)은 서울에 주재하면서 지방 관청의 서울에 대한 일을 대행하는 향리를 말한다. 이들은 주로 그 지방의 공물·입역 등의 일을 대행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에 '새로 임관된 사람은 경저리에게 판출(辦出)하기를 요청하고는 월리(月利)를 빌려서 그 빚을 갚으니, 필경 보상하는 물질이 모두 백성의 고혈입니다'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당참채의 뇌물 관행은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채수는 우리고장 사람으로 지금의 음성 원남에서 태어났고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중종실록은 그의 졸기에 대해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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