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 청풍을 크게 사랑하다, 명성왕후

2012.02.23 18:03:51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왕비 중 청주한씨 외에 우리고장을 관향(貫鄕)으로 한 가문이 또 있다. 청풍김씨로 현종비 명성왕후와 정조비 효의왕후 등을 배출했다. 명성왕후와 명성황후는 다른 인물이다. 명성왕후의 한자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이다. 흔히 민비로 불리는 인물이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이다.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인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淸風)에 세거했다.

청풍김씨가 문벌을 활짝 꽃피운 시기는 대동법 확장으로 유명한 명신 김육(金堉·1580∼1658) 때이다. 선조~효종 연간을 산 김육은 이때 이미 세거지 청풍을 떠나 한성에 터를 잡았다. 이처럼 시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누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을 경화벌열이라고 한다.

명성왕후와 효의왕후도 경화벌열의 여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 태어난 곳은 청풍이 아닌 서울이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김육이 사망한지 얼마 안 돼 왕비가 됐다. 바로 김육은 명성왕후의 친조부가 된다. 친아버지는 한때 복상(服喪) 문제로 송시열과 불화를 겪었던 김우명(金佑明)이다. 그녀는 한양 장통방(長通坊)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그녀는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거친 행동이 많았다. 특히 1675년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에는 대신들 앞에서 울부짖는 등 불미한 일도 서슴치 않았다.

홍수의 변은 복창군 삼형제 등 종친과 궁녀 사이에 불거진 섹스 스캔들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권력 투쟁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홍수는 직역하면 '붉은 옷소매'(紅袖)라는 뜻으로, 궁녀를 의미한다.

명성왕후는 비록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관향 청풍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 본래 청풍은 고려 때 나제(奈堤·지금의 제천)와 충주에 속할 정도로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현종 즉위년(1659)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다. 청풍이 왕비인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도호부는 지금으로 치면 市와 郡 사이가 된다.

'비로소 개정(開庭)을 명하여, 왕비의 아비 김우명을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으로, 어미 송씨(宋氏)를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으로 삼고, 성향(姓鄕)인 청풍군을 부(府)로 승격하였다.'-<현종개수>

그녀는 또 조선전기의 문신인 김식(金湜·1482~1520)이 청풍인이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명성왕후는 친부 김우명이 죽자 '기묘년 의 명현 김식(金湜)은 실로 자성(慈聖)의 선조가 되니, 자성이 사림을 구호한 것은 실상 그 원류의 소자출이 있다고 하겠다'(숙종실록)라는 추모글을 쓰기도 했다.

정조비 효의왕후는 좌참찬을 지낸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한성 가회방(嘉會坊)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명성왕후와 같은 본궁(本宮)이라는 곳에서 가례를 올렸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립됐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녀가 명성왕후처럼 관향 청풍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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