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과 합격률 전국 7위, 충주목

2012.02.28 16:57:36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문과(대과)는 1번이 아닌,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등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이는 국가고급 관리를 뽑는 만큼 엄정·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1단계인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초시에서는 성균관 유생 50명(관시), 한양출신 60명(한양시), 지방출신 140명(향시) 등 총 250명을 선발했다.

향시 140명은 경기도 10, 강원도 15, 황해도 10, 충청도 25, 경상도 30, 전라도 25, 평안도 15, 함경도 10명 등으로, 충청도는 한양을 제외하고 경상도 다음으로 많았다.

2단계인 복시는 관시 ·한성시 ·향시의 입격자 250명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시험을 보게 해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았다. 250명 중 33명을 뽑았으니까 실질 경쟁률이 대략 7.6대 1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다.

3단계인 전시는 2차 합격자 33명을 대상으로 당락이 아닌, 갑·을·병 순위를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봤던 전시는 부정행위가 없는 한 탈락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고로 전시 답안은 어둡기 전에 작성·제출해야 했고, 임금에게 집적 보이는 것인 만큼 정자체인 해서로 반드시 써야 했다.

문과 응시생은 천인과 상·공인을 제외하고 신분상 하자만 없으면 누구라도 응시가 가능했다. 이때의 하자는 죄를 지어 평생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罪犯永不敍用者)의 아들과 서얼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특히 교육 환경이 좋은 가정의 자손들이 아니고는 과거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양남과 기호 등 전도의 선비들이 반드시 쓰러질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나서서 일제히 응시하여 한 사람의 비용이 열 식구가 몇 달 먹을 밑천의 비용을 써야만 구경하고 왕복할 수 있을 것이니…'-<순조실록)

과거시험 답안지에는 본인 이름 외에 생년월일, 본관, 응시 당시의 신분 그리고 이른바 사조(四祖)와 처부(妻父)의 이름을 의무적으로 기입해야 했다. 사조는 친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외할아버지 등을 일컫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를 거주지별로 분석했다. 그 결과 한양이 1천6백20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정주 178명, 안동 94명, 평양 65명, 상주 64명, 양주 58명, 충주 56명, 수원 55명, 함흥 54명, 광주 50명 등이 이른바 톱10 안에 들었다.

우리고장 충주가 이례적으로 높게 나온 것은 관료들의 농장이 많이 분포했고, 또 조선전기에 이른바 충주사림 문화가 강하게 형성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 권람과 정인지는 음성과 괴산에 대농장을 갖고 있었고 김세필, 이자, 박상, 이연경 등은 남한강 주변에 거주했다.

이밖에 충주목 땅이 청주목보다 넓었던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음성과 제천의 상당지역이 충주목 관할이었다. 본관별로는 전주이씨 847명, 안동권씨 358명, 파평윤씨 339명, 남양홍씨 322명, 안동김씨 310명, 청주한씨 284명(6위), 청풍김씨 16명(36위)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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