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이원묘목, 왜 유명해졌을까

2012.03.22 17:33:13

조혁연 대기자

'초록 행복 푸른 꿈'을 슬로건으로 한 옥천 이원묘목축제가 오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전국 과수묘목의 60-70%를 차지하는 옥천이원묘목은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략 1930년대부터 묘목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1930년대는 일제 억압통치가 정점을 향하던 시기로, 묘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당시 이원면에는 안헌귀(1908-1970)라는 분이 생존해 있었다. 이원리 태생인 그는 한 동안 교편생활을 하다 1939년 귀향, 영농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30년이 지난 1964년에 충북도에서 발간한 '흙과 땀'(청구출판사)이라는 농촌 계도지에 싣게 된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후에 농협중앙회장도 역임하는 신명순(申明淳) 씨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발굴해낸 사람이 현 옥천군 친환경농축산과장으로 있는 이재하 씨다. 그는 옥천이원묘목이 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 안헌귀 선생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계도지를 찾아냈다. 이 글에 따르면 옥천 이원에서 묘목 생산을 처음으로 한 인물은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이원의 묘목생산은 일인(日人) 좌등(佐藤)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도묘(桃苗) 아접 정도이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남선 종묘사에서 충청남북도와 김천등지로 일묘(日苗)를 상거래하던 곽종혁씨 역시 도묘 정도의 자가 양묘를 하기 시작했다.'-<'흙과 땀' 중에서>

인용문에 등장하는 '佐藤'는 흔히 '사토'로 불리는 일본인 성씨이고, 도묘는 글자 그대로 복숭아 묘●을 일컨는다. 그러나 서두의 문장 내용을 봐서는 이원묘목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한을용씨, 김복헌씨, 안헌귀씨가 감나무묘, 복숭아묘, 배묘, 사과묘 등 대대적으로 생산하였고, 한헌섭씨, 주재욱씨등이 삽목으로 포도묘를 내고, 곽하재씨가 양앵도(洋櫻桃)를 산뻣에다 접 부치었고 김초옥씨는 강원도에서 잣을 사들여 양묘를 시작하는 등…'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여러 정황상 옥천이원묘목은 이때부터 전국적인 경쟁력을 보유했고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과수의 수종이 매우 다양하다. 또 '삽목'과 '양앵도를 산뻣에다 접부치었고'와 같은 기술적인 표현이 보이고 있다. 삽목은 순우리말로 하면 '꺾꽃이', '산뻣'은 산벗의 오기로 보여진다.

옥천 이원묘목은 이 과정을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옥천지역의 토양이 전반적으로 사질토라는 점도 입지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모래입자와 점토의 함유율이 많은 사질토는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이 적으나 투수성과 통기성이 좋은 토양을 말한다.

이렇듯 옥천 이원묘목의 오랜 명성은 신기술 수용+품종의 다양성+양호한 토양 성질 등이 삼위일체 식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역사 속에서도 옥천지역 식목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본조 양구주(梁九疇) 태종 때에 고을 일을 맡아보았는데 법을 시행함에 공정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임함에 간명하고 엄정하였다. 서산(西山)에 잣나무 3백여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도 관청에서 그 이익에 힘입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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