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에서 금강수계로, 충청감영

2012.03.25 15:03:17

조혁연 대기자

충청도관찰사는 오늘날로 치면 충북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충북과 충남이 나눠져 있지 않은 만큼 관할 면적이 훨씬 넓어 54개 고을을 관리 감독했다.

충청도관찰사는 종2품의 외관직으로, 달리 감사·도백·방백·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가 일을 보는 관청은 감영·영문·순영이라고 불렀고, 이들에게는 이른바 직계권이 주어졌다.

직계권은 국왕 외에 다른 부서의 통제나 명령을 받지 않고 상당히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보고는 국왕 앞으로 했고, 임금 외에 누구도 관찰사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관찰사도 임금이 보낸 암행어사에게 비리나 안일한 근무태도가 적발되면 파직 등을 당하곤 했다. 관찰사는 지방장관을 임명하는 것인 만큼 그 절차는 다소 복잡했다.

먼저 관료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조에서 후보자를 3배수 뽑아 올린다. 임금은 이중 한 명을 낙점, 통보하게 된다. 그러면 임면을 받은 인물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게 된다. 이를 '사조'라고 불렀다.

전현직 관찰사는 도계에 교귀소(交龜所)라는 곳에서 임무 교대식을 가졌다. 조선시대 관찰사 인장은 그 뚜껑이 공통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를 교대하는 장소를 교귀소라고 불렀다.

충청도관찰사의 교귀장소는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서 봤을 때 충청도의 초입에 해당하는 지금의 진천 광혜원에 교귀식이 많이 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천현 조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광혜원 고을 북쪽 38리에 있는데 죽산현 경계이다. 원곁에 정자가 있으니 이는 충청도의 신구관찰사가 인장을 교대하던 곳이다.'

관찰사는 관할지역의 재정, 형법, 군사, 치안 업무를 총체적으로 관리 감독했다. 그리고 관찰사 할 때의 '관찰'(觀察)은 '외관 즉 수령을 규찰'한데는 뜻이다. 따라서 관찰사는 1년에 두차례 정도 도내 지역을 순력(또는 순행)하며 수령의 근무 태도를 평가했다. 이를 '포폄'이라고 불렀다.

경국대전은 포폄에 대해 '관찰사는 매년 6월과 12월에 외관에 대한 포폄등제를 국왕에게 계문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외관은 수령, 계문은 문서로 보고하는 것, 그리고 포폄을 사회자가 말씀하신대로 인사평점을 의미한다.

관찰사가 올린 포폄 점수는 임금이 먼저 열람한 후 인사부서인 이조로 보내졌다. 이조는 이것을 기초로 개개인의 성적을 1년에 두차례에 걸쳐 상등, 중등, 하등 등으로 일종의 점수를 매겼다.

이를 '고과'라고 불렀고 이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이때 포폄 성적이 모두 '상등'을 받으면 1품계가 승진되고, 모두 '하등'을 받으면 파직됐다. 충청도관찰사가 집무하던 공간인 '충청감영'은 임진왜란 후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졌다.

충청감영은 207년 동안 충주에 위치다가 1602년(선조 35)에 공주로 옮겼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유근이라는 관찰사로, 그 이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충주 전지역이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감영의 이전은 충청도의 주도권이 남한강에서 금강수계로 옮겨간 것을 의미했다. 우리고장 충주지역 발전에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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