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임도 있다

2013.09.15 16:21:16

박영수

수필가, 딩아돌하 문예원 이사장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 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초가을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첩' 머리말이다. 이런 모임도 있었을까. 시 짓는 친구들 친목회의 규약(회칙)인데 만나는 날을 꽃피는 때에 맞춘 것이다. 한 편의 시 같다.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읊던 젊은 문사들의 고운 시심, 2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헤아려보아도 멋이 있다. 지난 해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이 글을 접하고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서울 올림픽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던 88년, 내가 사는 시청 인근에 7층 탑 같은 목욕탕 건물이 문을 열었다. 목욕문화의 선구자 현포 박학래 선생과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 두 분의 합작품이었다. 절묘한 건축미에 매료된 때문일까, 오시는 분들의 면면에 끌렸던 것일까. 이때로부터 버릇처럼 아침 등산 후 목욕을 하는 나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남짓 우암산 등산으로 땀을 흘리고 와서 30분 정도 욕탕에 몸을 맡기면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면서 창작 욕구가 솟구치게 마련이다. 산을 가지 않는 날에도 목욕은 거르지 않았다.

어느 날, 목욕탕 모임인 나우회(裸友會)에 입회를 권유를 받았다. 기꺼이 수락하고 보니 회원 중에 존경하는 어른인 현포 선생을 비롯하여 엄기현, 최병곤 원로 목사, 송암 조성진 총장 같은 분이 계셨다. 무척 조심스러웠다. 허지만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원로 분들의 유머 감각이 탁월한 데다 매일 발가벗고 만나다 보니 나이를 초월하여 스스럼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이 나우회에는 회장은 있어도 회칙도, 정례 모임 날도 없다. 편한 시간에 와서 목욕을 즐기다가 "이런 일이 있어 저녁을 내겠소, 커피 한 잔 사겠소."하면 즉석에서 모임이 주선된다. "단풍이 고우니 여행 갑시다." 할 때도 있다. 정례 모임은 신년 초 한 번 있다. 명절 때는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선물을 돌리기도 하고, 사회 복지기관에도 기척을 좀 한다. 내가 문화원에서 일할 때에는 모두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이 모임에 혼을 불어넣어 준 이는 고고학자 이융조 박물관장이다. 두루봉, 수양개에서 수 만년 잠자고 있던 선사유물을 찾아 내 한국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한 그 영광스런 대 장정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었다. 하여 목욕 멤버들이 발굴 현장을 누비는 문화재 지킴이가 되어버렸다.

어느 해, 단양 남한강변 수양개 유적을 돌아보다 현포 선생의 유머 감각이 빛을 발했다.

"우리가 알몸으로 만난다는 것은 선사시대 그 순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웃다 보니 마음이 통했다. "선사시대와 목욕문화의 만남"을 캐치프레이즈로 한 '문화사랑 학천모임'이란 이름이 이날 붙여졌다.

2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애석하게도 현포, 송암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셨으나 김연일 전 행장, 한장훈 원장, 남연훈 회장, 각연 스님, 유의재 지점장 등 쟁쟁한 멤버들이 들어와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5학년이던 나는 7학년 일수거사(一水去士)가 되었지만 임기중 초창기 총무는 5학년에 올라 청주시의장으로 활약 중이다. 미수(米壽)청춘 엄 목사님의 기도말씀은 여전히 힘에 넘치셔 가슴을 적신다. 현포 선생이 즐겨 하시던 시낭송은 김석연 수필가가 맥을 이었다.

"날마다 아침 일찍 목욕을 하면 병이 피해 간다."는 속담이 있던가. 목욕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는 삶의 청량제요, 건강관리의 파수꾼이기도 하다. 목욕은 역시 대중탕이 좋다.

세상에는 학연, 지연, 혈연에 얽힌 많은 모임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 모임을 통해 오방색 빛깔의 우정을 가꾸며 산다. 물로 맺은 인연, 청주에 이런 모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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