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여점 고문서, 기탁할 의사있다"

진천 평산신씨 신동석 총무
방대한 사료, 문중보관 이제는 한계
항온·항습 시설갖춘 전문시설 절실

2013.12.16 18:44:00

조선시대 진천 이월의 평산신씨 가문이 친척간에 고한글로 주고받은 간찰(편지)이다.

본보는 지난 11월 15일자에서 '진천서 나온 고문서, 근래 최고의 가치' 제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이들 고문서류는 채 해독이 끝나지 않아, 전체 6백여점의 내용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이들 유물에는 임진왜란 이전 것도 포함돼 있고 또 일기, 고한글 간찰, 분재기(재산 나눔 기록), 구한말 희귀사진도 있는 등 공개 자체가 화제가 됐었다.

평산신씨 충헌공(신잡) 종중의 총무인 신동석(51·사진) 씨를 만나 △유물을 공개한 배경 △그 동안의 보관 방법 △앞으로의 바람 등을 들어봤다.

- 종중 전체의 의견으로 충북대 사학과에 고문서류 해독을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물이 자연히 공개됐는데, 이 시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평산신씨 지칭) 문중이 보관해 왔지만 한번도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든 역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유물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문중에서 계속 보관하는 것은 늘 한계가 있다."

- 유물의 내용도 무척 다양한 편이다. 어떤 방법으로 보관해 왔나.

"처음에는 진천 논실의 평산신씨 문중 차원에서 보관했다. 그러다가 서울에 계신 직계 장손집에서 30여년 보관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보관은 공간이 협소해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따라서 장손께서는 아무 댓가없이 다시 문중에 보관을 의뢰했다. 그러나 문중차원의 보관 역시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전적류 내용도 알아 볼겸 충북대 사학과에 해독을 의뢰하게 됐다."

- 그 동안 분실이나 도난 맞은 유물은 없나.

"많이 분실되고 도난 맞았다. 그러고도 남은 것이 6백여점에 이르고 있다. 분실된 것중에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도 있지만 공개하기는 어렵다. 공유해야 할 유물이기 때문에 가져간 분은 조속히 돌려줬으면 한다."

- 충헌공 신잡의 묘는 본래 진천 논실이 아닌, 서울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떤 이유로 이장한 것인가.

"원래는 아버지(신화국)와 함께 서울 상도동에 영면에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70년대 개발 붐이 일면서 일대가 개발됐고, 따라서 이장이 불가피했다. 이때 영정이 있는 진천 노은영당 근처로 오게 됐다."

- 큰 문중의 총무 일이 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언제부터 문중 일에 관심을 갖게 됐나.

"20년 전부터 종중 행사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문중 어른들의 신임을 얻게 됐다."

- 평산신씨 유물과 관련해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거듭 얘기하지만 방대한 양의 유물을 종중에서 보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문중은 지자체나 국립 또는 대학 박물관에 기탁할 의사를 확실히 갖고 있다. 물론 지자체에서 전시관 또는 박물관을 건립해 보관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전적류는 항온, 항습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아울러 말하고 싶다."

신잡(1541~1609)은 조선 중기 형조·호조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도성을 탈출하려 하자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를 그린 영정은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로 지정돼 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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