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보다 더 따뜻한 언어

2014.06.02 13:38:29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해발 453m, 산 높고 골 깊은 이 고개는 박달재다. 치악산의 맥을 뻗어 백운산이 되고 그 줄기가 다시 남으로 달려 구학산, 박달산을 이룬다. 박달재는 동서로 봉양과 백운을 잇고, 멀리는 제천과 충주를 잇는 옛길이다.

흔히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그 옛날 슬픈 전설만큼 20년 전의 박달재는 힘겨운 산길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박달재 길은 산중턱을 뚫어 낸 터널길이 생겨 이제는 길의 기능보다는 관광지로의 역할로 변신 중이다.

지난 주말, 제천에 가는 도중 한가한 옛날 박달재의 길로 차를 이끌었다. 그 길에 올라서니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특별한 만남이 바람결에 실려 명멸하는 등대의 불빛처럼 기억 속에 깜빡인다.

멀리 산등성에 어둠이 내릴 무렵, 제천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내게 급한 전갈이 왔다. 큰 아이가 고열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해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늘 박달재가 문제였다. 당시 박달재는 좁은 2차선으로 오르막길에 속도가 느린 차량이라도 만나게 되면 뒤따르는 차들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평지에서 산길로 막 접어들면서 길은 더욱 어두워졌다. 미등을 켜고 산길을 서둘러 오르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시멘트 차량이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산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화물열차처럼 한량을 더 매달고 있었다. 추월은 꿈도 꾸지 못했다. 급한 사정을 트럭 운전기사에게 전할 길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비상등을 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급하니 추월을 도와 달라'는 의미로 보낸 것이었다.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한참 만에 반응이 왔다. 똑같은 비상등이 반짝였다. '알았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잠시 후, 우측 방향등에 불이 들어왔다. '추월해도 좋다'란 뜻이었다. 반대 차선으로 접어들었다. 거대한 시멘트 차량 옆을 통과하면서 어쩐지 안온한 보호막처럼 느껴졌다. 운전석을 지나는 순간, 난 짧게 클랙슨을 울리며 '고맙다.'라는 표시를 하자, 곧이어 '붕~'하고 뱃고동소리처럼 '괜찮다'라고 화답 해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미지(未知)의 사람과 신호를 통해 마음을 전하고, 받는 과정은 묘한 감흥을 주었다. 어둠속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시멘트 차량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 비상등을 켰다. '정말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러면서 다시 사이드 미러를 통해 시멘트 트럭의 반응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거대하고 따뜻한 짐승이 착한 눈을 껌뻑이듯 다시 비상등을 켜주었다.

'반가웠다. 조심해서 가라.'

비록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얼마 전, 특별한 장면을 목격했다. 버스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두 모녀였다. 말이 때론 소음이 되기도 하는 세상에서 조용히 손으로 말하는 모녀의 모습에서 난, 20년 전 따뜻한 차량의 언어로 교감하던 그 특별한 기억이 자꾸만 겹쳐지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말보다 더 따뜻한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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