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나의 동지여

2014.06.09 13:51:28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두 아들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아내는 갑자기 머리가 부쩍 세어 버렸다. 마흔을 넘기면서 진즉부터 염색을 시작한 나와 달리 40대 후반에 들어서도 염색과는 무관한 아내의 검은 머리를 바라보며 곁다리로나마 그래도 아직은 내 삶도 과히 늙은 것은 아니라고 자부해오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어깨에 비닐을 두르고 까만 염색약을 머리에 이겨 붙인 채 아내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간 장모님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뒤이어 처음 만나던 날 긴 생머리의 그 서늘하도록 청순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싸아 아파왔다. 혼자 염색약을 바르느라 여기저기 미진한 부분을 채워 발라주며 새삼 오랜 세월을 같이 해왔구나 하는 애틋함이 밀려왔다.

내 나이 정도의 남편들이 아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아마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유난히 개성 강한 자녀들을 두었다면 부부는 연합전선 수준의 전우애를 나누며 더욱 강한 결속력을 다지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경우에는 부부는 무엇보다 삶의 동지애가 절로 우러나는 듯도 싶다.

얼마 전 공교롭게도 똑같이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가 먼저 치료가 끝나 집으로 가고 나는 조금 더 누워 있는데 물리치료사가 넌지시 물었다.

"원래 서로 존댓말을 하시나요?"

"아이들 생기고부터 조금씩 써왔지요. 왜요?"

"좋아 보여서요. 저도 그래야겠어요"

우리 부부가 모범적이거나 금슬이 유난한 것도 아니다. 다만 경어를 쓰면 서로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힘들다.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서로 존대어로 시작해도 싸움이 심화되면 꼭 반말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도 부부간에는 꼭 경어를 사용했다. 남녀 간의 설렘과 사랑으로 만나 부부가 되었지만,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면서 부부는 상대의 삶에 대한 조력자로서 무엇보다 진한 동지애가 형성된다.

다산 정약용의 부인 홍씨는 다산의 유배 생활 중, 시집올 때 해 입고 왔던 다홍치마를 유배지로 보냈다. 결혼한 지 31년, 다홍치마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남편의 유배지로 혼인할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낸 그 마음이 무척이나 연연하면서도 궁금하다. '정표' '이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애틋한 애정 표시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다산은 학자답게 그 특별한 선물을 받고도 책으로 만들어 자식 교육에 보탤 궁리부터 했다. 그리하여 치마를 조각조각 잘라 두 아들에게 서찰로 써 보냈다.

"나는 벼슬하지 않아 남겨줄 게 없다. 오직 두 글자의 놀라운 부적을 줄 터이니 소홀히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한 글자는 검(儉)이다"

그러다보니 다산을 흉내 내어 나도 아내의 빛바랜 치마폭 위에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가르침의 글을 남긴다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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