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는 없다

2014.07.08 14:54:47

방광호

청석고등학교 교사

처음 종호가 더블 백을 메고 중대로 전입 왔을 때 우리는 모두 웃었다. 비쩍 마르고 껑충한 키에 시커먼 얼굴, 몸은 얼마나 꼿꼿한지 자칫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팔자걸음이었다. 게다가 약간은 겁먹은 듯한 무표정에 어눌한 노인네 말투까지 더하고 보면 이건 영락없는 고문관의 전형이었다.

제식훈련은 훈련소에서만 써먹고 몽땅 버리고 왔는지 동작 하나하나가 가관이었다. 한 마디로 재롱의 종합 세트인 녀석의 언행에 고참병들은 '다시, 다시!'를 연발하며 연신 종호를 들볶았다. 한데 녀석은 전혀 동요 없이 고장 난 인형처럼 계속 시키는 동작을 반복했던 것이다. 뭔가 힘들어 하거나 고통이 얼굴에 나타나야 재미가 동하는 법인데 그럴 기미라곤 애초에 없었던 듯했다. 그러잖아도 검은 얼굴이 검붉게 상기되었을 뿐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종호의 후임병들이 몇 명 나타난 뒤까지도 고참병들은 배부른 고양이가 갓 잡은 쥐를 희롱하듯 툭하면 불러댔다. 그러니 후임들조차 종호를 우습게보았고, 적당히 친구 먹자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종호가 소대원들이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의협심 강하고 성질 급한 고참 황 병장과 우연히 휴가를 함께 다녀왔다. 귀대하는 날 자정이 다 돼서야 소대로 돌아온 황 병장은 인사불성의 만취상태였고, 종호는 말짱했지만 개천에서 금방 건져 올린 신발짝처럼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다.

"황 병장님이 쪼매 취하셔서 늦었심더"

다음날 오후 늦게 숙취가 미처 가시지도 않았을 황 병장이 종호부터 찾았다. 걱정스런 얼굴로 나타난 종호가 그 어눌한 말투로,

"쪼매 개아니껴, 황 병장님예?"

하고 물었고, 황 병장은 종호의 두 손을 끌어다가 꼭 잡고 얼핏 눈가에 물기마저 보이며

"고맙다…, 고맙다!"

를 연발할 뿐이었다.

황 병장이 휴가를 갔더니, 빚보증을 서 줬다 집을 날릴 상황에 처한 아버지와 화병(火病)으로 누운 어머니, 수긍키 어려운 이 상황을 영문 몰라 하는 동생들로 집안은 이미 초상집이었다. 숨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술로만 휴가기간을 채우고 도망치듯 귀댓길에 올랐다. 차부에서 기다리던 종호를 만났지만 이대로 탈영이나 할까 싶어 술만 들이키고 있었더니, 죽은 귀신마냥 지켜만 보고 있던 종호가,

"황 병장님예, 무어 힘든 일 있으니껴? 그래도 술은 그만 드시지예. 저도 집에서 힘든 일 있을 때 술 좀 마시고 한잠 자고 나믄 개안킨 하대요. 하지만 저랑 밥좀 쪼매만 드시믄 안되니껴? 황 병장님, 휴가 가기 전보다 얼굴이 많이 안 좋심더"

하더란다.

술김에 '병신 꼴값 떨고 자빠졌네' 하며 종호를 바라본 순간, 맑고 그윽한 그 눈빛이 마치 부처님의 미소, 그것이더라는 것이다. '아아, 그래 너 같은 인간도 사는데…, 일단 제대는 하고 보자. 뭔가 길이 있을 거야!'란 생각이 깨달음처럼 오더란다.

차츰 황 병장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종호의 태도도 달라졌다. 3개월 후 황 병장이 미소를 지으며 전역할 때쯤 종호는 당당한 소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후임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어눌한 말투와 뒤로 금방 넘어갈 것 같은 걸음걸이는 끝내 못 고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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