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존재했던 동자석, 문인석에게 패배하다

2014.08.12 17:26:02

조혁연 대기자

망자(亡者)의 공간인 무덤을 부르는 명칭은 능(陵)·원(園)·총(塚)·분(墳)·묘(墓) 등 다소 다양하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나 세자비 또는 왕의 종실무덤을 일컫는다.

총은 규모가 크고 어떤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지만 매장자, 즉 묘주를 알 수 없는 경우에 붙인다. 가령 금관이 나왔으니까 '금관총'으로 부르는 경우다.

분은 옛무덤이지만 특이함이 발견되지 않는 평범한 무덤을 가리킨다. 이때는 지역명을 따서 'OO리 몇호분'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 외의 평범한 무덤은 '묘'(墓라)고 불렀다.

증평읍 율리 산 8-1에 백곡 김득신(金得臣·1604-1684)과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1577-1625)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묻힌 김득신은 생전에 아버지 묘를 살피기 위해 좌구산 아래 율리(밤티골) 산길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는 밤티골이 배경이 된 '율협'(栗峽)이라는 칠언절구다.

'산기슭 시냇가에 돌로 만든 대(山畔溪頭石作臺) / 올라서 바라보니 석양이 눈앞에 펼쳐지네개(登臨斜日兩眸開) / 시흥이 일어나 자주 붓을 들며(詩因有興頻抽筆) / 근심을 덜기 위해 빈번히 술잔 기울이네(酒爲銷愁每把盃) / 나그네의 혼은 꿈속에서도 서울에 가고(客子夢魂京裡去) / 친구의 편지는 골짜기에까지 전해 오네(故人書札峽中來) / 찾아드는 새봄에 까닭 없이 놀라고 깨닫는데(無端警覺新春近) / 적설은 녹기 시작하고 매화는 꽃망울 피우려네.(積雪初融欲綻梅)'-<임동철 전충북대 총장 역>

김득신의 묘는 동자석(童子石)이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봉분이 그리 높지 않는 등 비교적 소박한 외형을 하고 있다. 석인(石人)의 일종인 동자석은 16-18세기 원·묘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독특한 묘제 조형물이다.

김득신 묘의 동자석 모습.

동자석은 무덤 주인공인 묘주(墓主)를 가까이서 공손히 모시는 것에 그 의미가 부여돼 있다. 당나라 가도의 한시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 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네 / 다만 이 산 속에 계실 터이나 /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 수 없다네'에 등장하는 그런 동자를 떠올리면 된다.

따라서 동자석은 묘지 공간내 여러 석인(石人) 중 묘주 가장 가까이 자리잡는다. 김득신 묘의 동자석도 그런 위치에 있으면 쌍계(쌍상투)를 틀고 무엇인가를 모은 손에 쥐고 있다. 이른바 지물이다.

이 지물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시대 궁궐 출입시 대신들이 양손을 모아 쥐었던 '홀'(笏)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미술사적으로 봐도 동자석 지물은 연꽃, 홀에 이어 양손을 모으는 모습으로 변했다.

18세기 조선사회에는 예학사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비성리학적인 요소들은 모두 배척을 당했다. 동자석도 그런 시대 분위기에 휩쓸렸고 이후 문인석과의 석물 경쟁에서 패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김득신묘 동자석은 그 전에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득신이 동자석 옆 묘비명을 생전에 이렇게 써놓았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뿐이다.'(無以才不猶 人自畵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己)-<김득신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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