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각재판

2016.11.15 16:57:32

이정희

수필가

네 사람이 똑같이 투자해서 목화 장사를 했다. 값이 쌀 때 사들여서 창고에 쌓아두다 보니 쥐가 오줌을 싸고 누렇게 되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의논 끝에 고양이를 한 마리 사다 놓고 넷이서 각각 다리 하나씩을 보살피기로 했는데 고양이가 앞발을 다쳤다. 발을 맡은 친구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헝겊으로 감아 주니 절름거리면서도 잘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상처를 싸맨 헝겊에 그만 불이 붙었다. 당황한 고양이가 창고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불더미에 휩싸이고 목화는 죄다 타버렸다. 엄청난 손해가 나자 세 사람은 남은 한 사람에게 배상을 요구했다. 그 친구는 창고에 불을 낸 건 공동으로 산 고양이 때문이고 같이 손해를 본 터에 무슨 말이냐고 따졌다.

결말이 나지 않자 네 사람은 원님을 찾아갔다. 세 친구가 예의 고양이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자 원님은 목화 값은 너희들이 물어줘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놀란 친구들이 반대로 판결한 게 아니냐고 되묻자 원님은,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갈 때 어떤 다리를 이용했겠느냐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성한 다리였을 거라고 하자 원님은 바로 그 다리로 뛰어 가서 불을 냈으니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고 판정을 내린 것이다.

다리를 다쳤든 헝겊에 불이 붙었든 창고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의미다. 고양이 때문에 화재가 나고 송사를 벌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게 묘각재판의 배경이었으나 어떤 일이든 판단의 기준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는 사실이 참으로 묘하다. 불이 번진 1차적 배경은 고양이가 다리를 다치고 상처에 헝겊을 싸맨 것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덜 아문 상태에서 하필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헝겊에 불이 붙고 창고에 뛰어들면서 불이 난 거지만 한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건 어딘가 억지스럽다.

속상한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어느 한 사람이 아닌 고양이로 인해 벌어진 사고다. 상처를 치료해 준 친구는 자기가 싸매 준 헝겊에 불이 붙고 그 결과 손해가 났으니 속으로 무척 불안했겠지. 일부러 불을 낸 아니지만 공교롭게 그리 된 것을 보고 일말의 책임감도 느꼈을 텐데 턱없이 배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도의적인 책임감은 사라지고 그리 송사를 벌이게 되었을 것이다.

판결을 내린 원님 또한 같이 장사를 하다가 손해가 났을지언정 그렇다고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게 무척이나 괘씸했을 것이다. 세 사람이 저희들 주장만 내세울 때도 상처를 치료해 준 친구는 아무 말 없이 판결을 기다렸다. 한쪽에서는 강경하게 요구하고 다른 한 편은 구태여 잘못이라면 상처를 치료해 준 것 뿐인데 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던 대조적인 광경을 보면서 그렇게 기발한 판결을 내린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상황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시야가 놀랍다. 특정인이 아닌 고양이로 인해 벌어진 사고를 명쾌하게 판결할 수 있는 안목은 매사를 넓게 보는 혜안에서 나왔다. 우리 모두 사는 게 힘들다고 하지만 생각이 짧고 안목이 좁아서 파급되기도 한다.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을 때 모종의 세 친구처럼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지는 않았나 싶어 내심 착잡하다. 원인은 상대방에게도 있지만 내게도 있다. 1차적 원인은 몰라도 2차적 원인은 있을 수 있고 그게 더 커다란 문제로 파급되는 묘각재판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사는 게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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