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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6.09 14:15:36
  • 최종수정2024.06.09 14:15:36

이정희

수필가

(오피)이정희(마음)-인터넷

보리저녁에 쓰는 단상

따비밭으로 청보리가 어우러졌다. 종달새가 둥지를 꾸며도 될 만치 이삭이 늘차다. 여름이 벌써 무릎께 차올랐었나? 밭고랑 타고 일렁이던 진초록 물결. 아카시아 꽃 날리는 언덕으로 첫여름 바람이 따습다. 훈풍에 보리알 여문다더니 푸른 벌판 내달리던 골짝 물소리, 시냇물 소리.

시간을 짚어본즉 보리저녁이다. 보리쌀을 닦아서 냄비에 끓였다. 보리는 깔끄러운 곡식이라 이듬으로 삶는다. 푹 무르게 익혀서 쌀과 함께 다시금 안치기 때문에 초벌 안치는 시각이 곧 보리저녁이었다. 다르게는 해 넘어갈 즈음부터 밤이 될 때까지를 일컫는다. 오늘 따라 왜 그렇게 향수적인지.

마침내 밥이 되었다. 시간 반은 걸린 성 싶다. 콩나물과 가지는 푹 쪄서 버무리고 도라지와 상추는 겉절이를 무쳤다. 고추야 호박이야 쌈장을 넣고 끓인 박지기장을 곁들이니 왕후의 식탁이 부럽잖다.

보리밥과 보리저녁은 바늘과 실처럼 밀접하다. 썸머타임도 아닌데 한여름만 되면 재깍재깍 돌아가는 특별한 시간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이, 봄가을 겨울에도 없는 여름 해시계만의 이벤트였던 것을.

6월은 또 보리의 계절이다. 가장 먼저 보릿고개가 있다. 해시계 보리저녁도 뜬금없는데 태산보다 높은 영마루가 생긴다. 춘궁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음력 4월에서 5월까지는 배가 등짝에 붙을 정도로 배고플 때다.

밥을 묘사한 화조도까지 생겼다. 이팝나무 조팝나무의 꽃은 쌀밥이고 조밥이다. 떡국을 뜻하는 뻐꾹새가 있고 며느리밥풀 꽃까지 들먹이며 허기를 달랬다. 오죽 넘기 힘든 고개였으면….

보릿고개를 넘게 했던 음식도 등장했다. 음력 사월이면 아침에 나온 애기가 저녁에 인사한다. 그만치 해가 길다. 온종일 허기에 목은 삘기처럼 늘어지고 그때 먹은 것이 보리 개떡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보릿고개 사연이다.

설늙은이 떨게 만드는 보리누름 추위도 있다. 보리가 익는 한여름 반짝 추위다. 오뉴월에 서리친다더니 진짜 고춧 모 가짓 모 등이 얼어 죽는 것을 보았다. 보리누름추위에 시달리다가 변을 당한 어르신도 있었을 법하다. 하룻밤 새 보리 이삭 안부가 궁금할 때다. 가뜩이나 어설프고 빈약한 시기에 엎친 데 덮친다.

보리는 결국 가난한 곡식이다. 보리를 거두는 6월도 가난해 빠졌다. 5월의 신록은 가뭄과 함께 희미해졌다. 화려했던 벚꽃과 철쭉 진달래는 다 지고 허옇게 피는 망초대 뿐이다. 굶주림으로 때꾼해진 눈에는 꽃보다 밥이지만 먹을 것은 눈 씻고 봐도 없다. 먹을 게 흔한 지금은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보리가 들어간 말만 잔뜩 생겼다. 그 즈음 울기 시작하는 보리매미도 소리는 시원찮고 자그마한 몸집 때문에 나온 이름이다. 태생일 텐데 배고픈 와중이라 더 그럴법하게 들렸을 거다. 건성건성 두는 보리바둑이 있는가 하면 그런 식으로 판 짜는 보리윷까지 있다.

돌연 뒷산 어름에서 소쩍새 울음이 들려온다. 가난한 보리계절에 처량한 소리가 가슴을 후빈다. 그 소리를 들은 것 또한 6월이다. 절기상으로는 장을 달일 때였다. 맛난 간장 좀 먹자고 해마다 그 즈음이면 보릿고개만치나 힘들다.

그을음이 난다고 바깥마당에 솥을 걸고는 양동이로 수없이 퍼 날랐다. 태생부터가 약골이다. 자그마치 스무 장 메주를 건지고 달이다 보면 소쩍새 소리까지 처량하다. 소쩍 소쩍 솥솥쩍 하면서 난데없이 솥 적다는 타령조 소리. 마늘은 알이 굵고 보리가 익기 시작하는 그때, 장 달이는 솥이 작다고 소쩍 소쩍 약을 올린다.

한 섬들이 가마솥은 해마다 메주를 삶아대는 서슬에 구멍이 나버렸다. 가장 큰 양은솥도 가마솥보다는 작고 가볍다. 다루기는 편했으나, 간장 퍼 나르는 게 고역이지 가마솥이라고 다를 건 없다. 소쩍새 솥타령은 무의미하게 끝났다. 보릿고개에 안성맞춤 투정이기는 했지만….

우렁차면 그나마도 들어줄만한데 며칠을 울어쌓던 것 치고는 앙상한 소리였다. 양식도 아니고 솥이 작다니, "아무렴, 돈이 없지 지갑이 없겠어?"라는 지청구가 절로 나왔다. 해마다 흉년에 보릿고개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건만 그렇게라도 엉너리치면서 가난을 달래던 철부지 새다.

다락보다 높은 보릿고개 탓인지 개망초 꽃도 얄팍하게 벙근다. 보리 패기만 기다렸으나 모두가 지쳤다. 보리개떡조차 배불리 못 먹고 간장에 냉수를 타마시면 헛헛하기만 했을 테니, 서산에 걸려 있는 해가 오죽 서러웠으랴. 보릿고개도 사라졌는데 전설 같은 얘기가 꿈속처럼 왜 자꾸 떠오르는지.

창문을 열었다. 바람결에 보리피리 소리가 낭자하다. 이삭이 나올 듯 말 듯 내비치던 5월 어느 날, 여린 줄기를 꺼내 자른 뒤 끝을 살짝 깨물면 그대로 납작해졌었지. 짧을수록 높은 소리가 나고 길어질수록 부드럽고 낮은 소리를 내던, 그 소리 또한 첫여름 풍경의 백미였다. 천연의 관악기로 그렇듯 청아한 소리도 드물 테니 허기는 사라졌을까.

보리가 팰 즈음 잡히는 보리숭어가 그나마 넉넉한 느낌이기는 했다. 그때 잡은 숭어는 통통하고 육질이 쫄깃해서 별미였다지. 개숭어 참숭어 가숭어 등 많으나, 보리가 팰 즈음에는 무조건 보리숭어가 된다니 초여름 가십거리로는 충분했다. 보리가 익는 6월은 그만큼 엉뚱한 절기였으니까.

한여름이지만 보릿가을도 있다. 가뭄까지 겹쳐서 초목까지 허기질 즈음이다. 가을보다 배부른 느낌이 얼마나 좋았으면 다짜고짜 보릿가을이라 했을까. 누군가는 누렇게 물든 보릿가을 앞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겠다. 소풍 날 받아놓고 열 번은 다녀온 것처럼 이삭을 자르기도 전에 먹어 치웠을 특별 캐릭터였다.

당분간은 그림 속의 떡이었어도 그렇게나마 허기를 채운 농심이 짠하면서도 해학적이다. 더는 배를 곯지 않으리란 설렘도 첫여름 느낌이다. 보리애서 파생된 그 때 그 얘기를 묶어보았다. 윤사월 보리누름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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