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불시착하다

2016.12.27 15:18:53

이정희

수필가

청미천 기슭에도 겨울이 왔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뻘 밭에 눈이 쌓이고 나니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초겨울까지 갈대에 뒤덮여 운치를 자아내던 게 동지가 지난 뒤로는 썰렁하기만 했는데 눈이 쌓이면서 그렇듯 바뀌었다.

오늘따라 감회가 새롭다. 계절의 후미에 처져 한동안 눈에 띄지도 않던 풍경이다. 거칠기만 한 뻘밭도 더러는 아름답게 보인다. 이른 봄 꽃다지가 뒤덮일 때는 유채꽃밭 이상으로 화려하다. 보라색 제비꽃이 무리를 지어 필 때도 흔한 묵정밭의 이미지와 딴판이다. 늦은 봄 허옇게 바랜 것 같은 망초꽃도 어느 때 보면 안개꽃처럼 예쁘다. 바닥을 기는 민들레와 고들빼기도 뽀얗게 눈부셨다. 그나마도 봄 여름 가을 뿐이고 겨울이 되면서 까맣게 멀어졌는데 눈속에서 다시금 예쁘게 태어났다.

한겨울 갈대밭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건 배경 탓일 수 있다. 계절의 후미에 처져 눈에 잘 띄지도 않던 곳이지만 군청색 하늘에 철새가 날아가고 갈대가 흔들리면 더없이 희귀한 앙상블이 나온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날아가는 철새만 봐도 쓸쓸한데 아쉬워나 하듯 흔들리던 갈대밭 노래가 고스란히 묻어날 것 같다. 초겨울이 되고 잿빛 풍경으로 바뀔 때는 썰렁하기만 했는데 몇 차례 눈이 오고 그럴 때마다 바뀌던 환상의 스케치.

가끔 물가에서 자맥질하는 물오리도 겨울이면 친근한 풍경의 하나이다. 저들 역시 계절의 변두리를 찾아다니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분명 저 살던 곳보다 따스한 곳을 헤매다가 불시착했겠지. 불시착은 곧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듯, 그래 겨울이면 으레 찾아오는 철새가 되었을지언정 잠깐 추억의 합수머리를 돌아 까마득히 멀어진 그 때로 뚝 떨어지면 참 아기자기할 텐데 싶어지는 추억의 여울목.

내 삶에도 뻘밭이 있을 테지만 묵정밭의 겨울을 생각하면 그런대로 희망은 있고 그 또한 삶의 버팀이라는 소망을 품어 왔다. 겨울은 또 춥고 썰렁했지만 그런 속에서 기다리는 봄이라 더 소중했을 것이다. 우리 늘 시련을 기피해 왔으나 승승장구 잘 풀리면 교만해질 수 있기에 시련을 겪으면서 모난 기질을 가다듬는 것처럼.

앞으로 더 추워지면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도 완상할 수 없이 황폐해지겠지만 그 즈음이면 봄도 멀지 않을 것을 믿는다. 뻘 밭 특유의 으스스한 느낌도 없지는 않을 것이나, 지나갈 때마다 느끼는 감상은 그런대로 환상적이다. 추운 속에서도 어쩌다 오늘처럼 눈이 쌓이면서 바뀌는 풍경 때문이다.

내 삶의 뻘 밭도 늘 그렇게 우중충한 느낌이었으나 때로는 돌파구가 될 것을 믿는다. 겨우내 시들어버린 갈대가 눈 속에 파묻혀 그럴싸한 풍경을 연출하듯, 내 삶의 묵정밭에도 갈대가 피고 철새가 날아가는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면 나름 소중한 공간이다. 무엇인가를 심어 거둘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 해도 이따금 펼쳐지는 한겨울 풍경은 아름다웠던 것처럼 힘들 때 가끔 들어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이라면 더없이 유익한 곳으로 바뀔 테니까.

특별히 뻘밭의 겨울이라 더 애잔하게 다가오듯 운명이 새끼를 쳐도 모르게 무성한 삶의 묵정밭에서 보는 예지가 더 감동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삶 또한 풍요롭고 넉넉할 때보다는 힘들고 어려울 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애써 견딜 동안의 곡절이 한 겨울 갈대밭의 진풍경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연말을 맞아 썰렁했던 마음도 한결 따스해진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