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손님 한객(寒客)

2017.02.05 14:52:21

신종석

숲해설가

기온이 뚝 떨어졌다. 창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보니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달아난다. 몸서리를 치며 얼른 문을 닫았다. 눈이 내렸고 수운주가 뚝 떨어지는 혹한이 계속되는 엄동설한이다. 이렇게 추운 날엔 집안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책이나 읽기에 딱 좋은 날이다. 그러나 집에 있기에 좀이 쑤셔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 해마다 이만 때 쯤 은근한 향기로 우리를 부르는 그리운 이가 있어 그를 찾기로 했다. 방한복을 두텁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가까이 정을 나누며 생태공부를 함께 하는 지인과 둘이서 우리가 향한 곳은 오지에 속하는 소전리 벌랏 마을이다. 굽이굽이 대청호를 끼고 가다보니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외길이 나온다. 더러더러 쌓인 눈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산의 풍경은 흰옷을 살짝 걸치고 속살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여인네의 수줍은 모습 같으면서도 정갈하고 단정하다. 소전리2구를 지나고 고성말랑 고갯길을 넘으니 '벌랏'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마을정자 앞에 차를 세우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꽃 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눈을 감고 은근히 풍기는 꽃의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마음은 아득해지고 모든 감각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정자 옆에 내가 그리던 향기가 느껴진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앙상한 가지에 꽃 몽우리가 한창이다. 엄동설한에 연한 노란빛을 띤 꽃잎이 이제 막 피려고 하고 있다. 살얼음을 꽃잎에 품은 것 같이 투명한 꽃은 아래를 향하여 꽃잎을 다소곳이 접고 있다. 그 모습이 더 애처로울 뿐이다. 코끝이 찡하도록 매운 날씨에 바람결에 스치는 은근한 향기는 추위 따위를 무색하게 만든다.

미동산 수목원 온실에서 넋을 잃고 보던 이름도 생소하던 납매와는 조금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벌랏마을의 납매는 온실속의 납매와는 격이 다르게 고고하고 애처롭고 가련하다.

납매라는 다소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은 섣달을 뜻하는 한자 섣달 납(臘)과 매화를 뜻하는 매화나무 매(梅)를 붙여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섣달에 피는 매화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은 매화와는 상관없이 쌍떡잎식물로 녹나무과 낙옆교목 으로 중국이 원산지라고 한다. 꽃을 만나기 어려운 겨울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꽃이기에 별명도 여럿이다. 꽃 색이 노랗다고 황금매화 중국이 원산지이라 당매 가장먼저 꽃 소식을 전한다고 화신, 또는 추위를 뚫고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에 비유하여 한객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객(寒客)의 애처로운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면서 한쪽 눈을 감았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라고 말한 사진작가 앙리까르띠에브레송의 말이 생각났다. 마음으로 그와 대면하면서 그는 왜 가장 고통스러운 엄동설한에 꽃을 피우는지 알 수가 없다. 자손번식을 위하여 혼인을 도와줄 곤충이나 환경을 고려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벌도 나비도 모두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날씨마저 도움을 줄 수 없는 치명적인 시간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해 향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고 바람이 부는 날을 기다리며 추위와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답을 찾았을 것이고 그 시기가 그에게는 최선 이었으리라고 이해 할 수밖에 없다.

납매의 개화를 시작으로 꽃소식이 겨울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가 되었다. 옛 선비들은 탐매(探梅) 라는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매향을 좆아 춘설 속에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나도 유서 깊은 고택의 담장이나 고찰의 뜨락 고목에서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 길을 떠나는 풍류를 즐겨봐야겠다. 여행길에 꽃 중에 꽃 설중매라도 만나면 그 기쁨 또한 클 것이다. 은근한 향과 기품 있는 자퇴 그리고 아름다운을 모두 갖춘 매화를 보면서 그의 고매한 품격과 은은한 향기가 나의 삶에 녹아들어 아름다운 생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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