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향연 - 물 한 모금

2017.04.27 17:13:38

어릴 적 여름이면 소를 뜯기러 마을 앞으로 흐르는 미호천 냇가로 나갔다. 순한 어미 소는 여유롭게 홀로 강둑을 오가며 풀을 뜯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 멱도 감고 맨손으로 고기도 잡았다. 물속 풀뿌리 사이를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 움키어냈다. 가끔은 한 뼘이나 되는 큰 붕어도 잡았다. 잡은 물고기를 바랭이 풀 꽃대에 아가미를 꿰어 가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해 질녘 한 손으로는 소고삐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물고기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 하였다.

할아버지는 물고기 매운탕을 무척 좋아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맛있게 잡수실 것을 생각하면 절로 신바람이 났다. 야트막한 산 아래 동네 초가집들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도 저녁밥을 지으시느라 아궁이 앞에서 매콤한 연기에 흐르는 눈물을 앞치마로 훔치고 게시겠지· 저녁 무렵이면 더위가 가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 하였다. 좁은 논밭 둑을 따라 일 열로 친구들과 함께 소들을 몰고 집으로 향했다. 날파리를 쫒는 소들이 목덜미를 좌우로 흔들어 대니 워낭이 땡그랑 땡그랑 박자를 맞추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을 한다. 지금도 그 모습이 꿈속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였다. 할머니는 어린 손주가 어떻게 물고기를 이리도 많이 잡아왔느냐고 하면서 무척 대견해하셨다. 어머니는 금세 저녁 밥상에 짜글짜글 매운탕으로 끓여 내놓으셨다. 매운탕을 맛있게 잡수시면서도 할아버지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앞으로 물고기는 그만 잡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나중에 성공했을 때 시장에서 더 맛있는 고기를 사 오너라."

할아버지는 그리도 맛나게 잡수시는 매운탕보다도 손자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을 더 바라셨다. 그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를 않아 십여 년의 투병 생활을 하시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봉양에도 한계가 있었는지 내가 중학교 삼학년 때 세상을 뜨셨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맛있는 고기를 사다드릴 기회가 오기도 전에 할아버지께서는 환갑도 못 넘기신 채 돌아가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다하지 못한 효도를 할머니께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객지에서 가끔 집에 오면 연로하신 할머니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때로는 머리도 손톱 발톱도 깎아 드렸다.

어느 토요일 날이었다. 청주에 도착을 하여 시내버스로 갈아타는 길가에 잉어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연로하신 할머니께 보양식이라도 해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격을 물어 보니 삼천 원이란다. 그 당시는 삼천 원이 적지 않은 돈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모자랐다. "아저씨 작은형 집이 십분만 걸어가면 있는데 같이 가주시면 잉어를 사겠습니다." 고 했다. 아저씨는 쾌히 승낙을 하시었다. 사정을 설명하며 작은 형수에게 돈 삼천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형수는 이미 늦었다고 하면서 할머님께서는 지금 아무것도 드시질 못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연세는 드셨지만 지난번 때까지만 해도 식사도 잘 하셨는데…. 아저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 효성스러운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며 이해를 해주시었다.

안방에는 할머니가 누워 게시고 같은 동네에 사시는 친척 어른들 몇 분이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아버지가 셋째 손자가 왔다고 큰 소리로 할머니 귓가에 바짝 대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힘겹게 눈을 가늘게 뜨셨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숟가락으로 미지근한 물을 떠 넣어 드렸다. 할머님께서는 힘겹게 물 한 모금을 넘기시었다. 효행록에 전하여 오는 왕상의 고사가 생각이나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옛날 중국에 왕상이라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병을 앓으면서 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왕상이 옷을 벗고 강의 얼음을 깨고 들어가려 하였더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속에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잉어를 먹은 왕상의 어머니 병이 나았다 한다.

진작에 할머님께 잉어를 사다 과드렸으면 기운을 차리시고 더 살아계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날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나도 칠십을 바라보는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고 이제 구순이 넘어 홀로 되신 어머니만 생존해 계신다. 내일은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

이기원 프로필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수강

제8회 도민백일 운문부문 차상 수상
학생체험활동 인솔교사 안전연수 강사
2015년 황조근조훈장 수상
중고등학교장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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